[인간탐구] 한국노인학회 이돈희 회장

"노인들의 나머지 삶은 우리들 몫"

이돈희(55)씨는 좀 엉뚱하고 집요하다. 40년 전인 고3때 반장이 된 사연. 평소 전교 2위 성적의 우등생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내성적인 성격에 덩치도 작아 늘 반장자리를 빼앗겼다. 3학년은 이를 만회할 마지막 기회였다.

새 학년에 오른 첫 날, 무조건 반 한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들어서자마자 냅다 큰 소리로 차렷,경례 구령을 붙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누가 부탁한 적도 없다. 얼마 후 정식 반장선거에서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당선됐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일생 벌여온 일들은 이보다 더 엉뚱하고 끈질겼다. 거의 40년째 한가지 일에 매달려왔다. 그는 해마다 가정의 달이 오면 특히 빛나는 사람이다.

과거 어머니 날이 어버이 날로 바뀌는데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아버지 날’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현재 10월 2일로 지정된 '노인의 날'이 탄생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신이기도 하다.

감정평가사라는 본업을 가진 그는 요즘도 한국노인학회 회장으로 생업 못지않게 열심이다. 노인의 날도 무색하게, 노인들에게 닥치는 현실은 점점 더 우울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과 노인들 잇는 고단한 중간자

“제가 사는 아파트의 한 80대 할아버지는 국영기업체 간부로 있다가 퇴직해 장남과 함께 삽니다. 자식들도 대학교수를 비롯해 다들 똑똑하고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큰며느리가 자신에게 ‘아버님은 왜 우리집에만 계시냐’고 대놓고 묻더랍니다.

‘죽을 때까지만 있게 해달라’'고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괴로워 다른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한 아들은 ‘오늘 회사 손님들이 집에 오기로 했다’며 집에 못 오게 하고, 한 아들은 대뜸 ‘얼마 전에 10만원 부쳐드렸는데 왜 그러시냐’고 하더랍니다.

솔직히 당장 죽고 싶은데 지금 자살을 해버리면 자신이야 죽어 편하겠지만 남은 자식들 얼굴에 먹칠이 될까 봐 그것도 못하고 있다고 제게 털어놓더군요. 노인 문제는 꼭 가난하고 못 배운 분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연로한 부모 대접이 차라리 남만도 못해지는 세상. 요즘도 그는 틈날 때마다 언론에 노인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제언을 올리고, 관련 논문을 쏟아놓곤 한다.

한편에선 노인학교 등에 강연을 나가 ‘자식들에게 환영 받는 비법’을 아는 대로 일러주기도 한다. 나이로도, 마음으로도 그는 젊은이들과 노인들 사이를 잇는 고단한 중간자다.

아버지 날을 만든 것은 선린상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3년이었다. 이씨의 고향은 경북 상주, 어린 시절 병환으로 헤어져 살았던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버지가 채워주었다. 그 각별한 은혜가 내내 마음에 사무쳐있었다. “아주 외롭게 컸습니다.

제가 태어난 직후 어머니는 병환으로 오랫동안 외가에 가 계셨고, 아버지도 건축 현장소장이라 늘 지방에 나가 계시다 보니 저를 돌봐줄 분이 없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때 저는 서울의 아버지 친구분 댁에 맡겨져 학교에 다녔는데, 어린데다 워낙 내성적인 저는 그 집 식구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도 대문 초인종을 누르지 않은 채 가정부가 연탄재를 버리러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마냥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곤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아버지께 말씀 드려 아버지랑 지낼 작은 방 하나를 얻어 따로 살았는데, 12살 때까지 그렇게 혼자 밥을 지어먹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서울에 올라와 주무시고 가셨는데, 어느 비오는 밤인가 잠결에 어머니를 찾는 저를 보고 당신 마음이 애처러웠는지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분이 저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곤 나직한 소리로 부르시던 구슬픈 노래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린 아들이 지어온 밥에 제법 큰 돌이 섞여있었는데도 그것이 씹히자마자 행여 아들이 마음을 쓸까 봐 소리없이 삼켜버리던 아버지. 비오는 날 정류장에 나와 선 아주머니들을 보고 어머니 생각에 엉엉 울며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목욕시켜주던 아버지.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해 가족이 다시 웃음을 찾은 뒤에도 어린시절을 지켜준 눈물 어린 부정은 내내 이씨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았다.

고 2때의 어느날, 어머니만 아니라 아버지 가슴에도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방과 후마다 학교와 집 일대를 돌아다니며 1,000여명을 대상으로 아버지 날 제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내용을 가지고 자신이 다니던 성당에서부터 시작해 1965년 동국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후엔 이화여대 학보사를 비롯, 일간지와 잡지사 등 눈에 띄는 모든 언론매체를 찾아 다니며 끈덕지게 아버지 날을 외쳤다.

좀처럼 기사를 실어주는 것이 없어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짧은 광고, 자신의 용돈은 언제나 그곳에 털어넣었다. 그 광고 중 하나가 실려있는 1968년 판 주간한국 한 권을 그는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노인문제로 방송출연 500회

1968년, 그는 대학 4학년이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 열어보니 낯선 할아버지 한 분이 ‘돈을 좀 달라’며 구걸을 했다. 아무리 봐도 행색이 거지같지 않아 캐물어봤더니 유학파 출신 아들에다 방송에도 곧잘 출연하는 인텔리 며느리를 두고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직접 생활비를 구하러 나섰다고 했다.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날부터 노인문제에 몰두,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나 양로원의 어르신들을 찾아 다니며 현실을 알았다. 그 가운데 노인의 날을 만들어냈다. 아버지 날에다 노인의 날 제정문제 모두를 쫓아다니자니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담이 컸다.

광고와 자료구입비, 활동비, 하다못해 매달 수십 수백통의 우편비용까지 전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 비용을 대기 위해 대학시절 쉴 틈 없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한때는 ‘10월 8일(설문 조사결과 이씨가 정했던 노인의 날 후보날짜) 결혼식을 올릴 부부가 청첩장을 보내주면 추첨을 통해 2000원을 주겠다’는 이색광고도 낸 적이 있다.

당시로선 적지않은 그 ‘행운의 당첨금’ 역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었다. 1971년엔 더욱 눈물겨운 제1회 노인의 날 행사도 있었다. 당시 24살의 새파란 젊은이 이씨가 사비를 털어 외롭고 가난한 노인들 450명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나누는 자리였다.

결국 그 엄청난 경비를 더 이상은 감당하지 못해 이듬해엔 신문에 ‘행사 취소’ 광고까지 내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1973년 건국대 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를 졸업, 감정평가사가 된 것도 노인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도 그가 가진 계획중 하나는 ‘실버타운’을 조성하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기댈 필요 없이, 마을에 논밭과 과수원, 축산 시설 등을 갖춰놓고 노인들끼리 모여 살며 적당할 만큼의 농사일을 통해 운동 겸 소일도 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경제적 자립도 이루는 황혼의 안식처다.

그 부지를 물색하고 싶었던 이씨에게 감정평가사 만큼 적절한 직업이 없었다. 토지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동,부동산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는 이 전문직을 통해 전국의 토지를 가까이 살펴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고소득이 보장되기도 했다.

경쟁률도 치열한 그 자격시험에서 1974년 그는 최연소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곧 국영기업체인 한국토지공사에 입사, 여러 부서장을 거쳐 1998년 부처장이란 직함을 끝으로 퇴직했다.

재직한 21년 동안에도 퇴근 후 일과는 늘 같은 것이었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에 보낼 글이나 언론사, 사회 저명 인사들에게 부칠 호소편지를 쓰는 일, 또는 활동경비를 보태기위해 멀리 지방에까지 내려가 고시학원의 강의를 하는 것 등. 결국 과로로 심한 디스크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더 효과적인 여론화를 위해 방송국에도 끈질기게 노크, 인터뷰 기회를 얻기 위해 무려 15번이나 편지를 보낸 곳도 있다. 그렇게 서서히 이루어진 인터뷰 약250회, 방송출연 약 500회의 기록, 그에겐 눈물겹고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수모란 수모는 다 당해보았다. 신문사, 방송국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전에서 수위로부터 수모를 받으며 쫓겨나기 일쑤, 세 번이나 찾아간 한 PD는 ‘당신 뭣 하는 사람이냐’며 노골적으로 창피를 주었다.

심지어 노인들마저 그를 오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괜히 우리를 팔아서 자기 이름이나 내려는 게 아니냐’며 의심을 보였다. 온통 사면초가였다. 유일한 아군은 동갑내기 아내 강연식씨였다.

“그때마다 집사람이 오히려 용기를 줬습니다. 이렇게 그만두면 지금까지 애쓴 게 너무 아깝지 않냐 구요. 팔불출이라고 하겠지만, 집사람은 제게 정말 천사입니다. 한참 나이가 들고서야 안 일이지만 저와 결혼 한 것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일, 제가 몹시 힘들어 하면서도 어떻게 든 해보려고 애쓰는 게 미덥기도 하고 너무 안쓰럽기도 해서 자신이라도 결혼해 곁에서 도와주고 싶었답니다.

결혼 후 월급만으로 경비를 충당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원래 몸이 약해 처녀적에도 직장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이 자신도 나를 돕겠다며 하루 3시간 반이나 걸리는 통근 길도 힘들다 소리 한마디 않고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지요.

지금 성남 성일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정말 나중에 제가 죽으면 설령 천당이라도 저 혼자라면 가기 싫고, 집사람이 가는 곳에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73년 어버이날 제정 결실, 실버타운도 현실로

그 후 일어난 변화. 1963년에 만들었던 아버지 날은 10년 만인 1973년 어버이 날로 결실을 맺었고, 노인의 날은 제정운동 29년 만인 1997년 정부의 입법절차에 따라 정식 국가기념일로 자리잡았다.

개인적으로 얻은 것이라곤 실리 대신 이름값에 대한 더 무거운 짐뿐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격려와 따뜻한 미소만으로도 이미 보상은 충분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러 청학동에서 찾아온 어르신, 채 말릴 겨를도 없이 거의 손자 뻘인 그에게 보자마자 절을 하는 어르신.

요즘도 그의 집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실버타운의 꿈이 실현될 날도 영 멀지는 않다. 그간 열심히 벌어 모은 돈으로 이미 약 7,000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더 엄청난 나머지 비용해결문제는 ‘하나님 뜻’에 맡겼다.

사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고 이어진 것은 어려서 부터 간직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의 신앙적 힘 때문이었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그는 현재 80대의 부친과 70대의 모친을 모시고 있다. 몇 년 후면 60고개를 바라보는 이씨라도 팔순의 부친 앞에선 여전히 어린애 신세다. 요즘도 아버지의 꾸지람에 슬리퍼를 끌고 나서지 못한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꼭 챙겨가라’는 말씀이 단 한번도 빠지는 법이 없다.

어쩌다 연락을 못한 채 귀가가 늦기라도 하면 아파트 경비실 앞까지 나와 고개를 빼고 기다리신다. 벌써 귀밑엔 백발이 솟아난 50대 아들이 아직도 불안스러워서 말이다. 20대때부터 밖에선 노인박사로 불려온 아들이 아버지의 황혼 아래선 나이도 마음대로 빨리 먹지 못한다.

입력시간 2002/05/1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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