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남성 포크듀오 쉐그린(上)

남성 포크 듀오 쉐그린은 답답했던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한바탕 웃음바다로 흥겹게 하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해주었던 노래의 전도사였다. 만요식 창법의 <동물농장> <얼간이 짝사랑>등 코믹 포크송들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64년 최초의 포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불렀던 <동물농장>의 감각적인 재 편곡은 온 나라를 온통 동물나라로 탈바꿈 시켰다. 도처에서 닭, 염소, 고양이 울음 흉내소리가 요란했을 만큼 쉐그린은 코믹포크송의 대중화를 일궈냈다.

또 처음으로 시도한 포크와 록을 접목하는 음악적 실험은 대중가요를 한 걸음 발전하게 했던 기름진 자양분이었다.

쉐그린은 서정적인 분위기의 노래를 선호했던 이태원보다 장난끼가 철철 넘쳐 나던 전언수의 코믹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던 듀오였다. 이태원은 ‘전언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내가 쉐그린 멤버였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전언수는 쾌활한 성격에 작사ㆍ작곡ㆍ편곡까지 해냈던 다재 다능한 재주꾼이었다. 이에 반해 이태원은 노래를 직업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이 지은 노랫말을 음미하며 부르기를 좋아했던 내성적인 성품이었다. 성격은 판이했지만 오랜 활동기간동안 서로를 아껴 주었던 든든한 음악 친구인 이들은 지금도 친형제 같은 끈끈한 인간적 고리를 연결해오고 있다.

서울 토박이 전언수는 1948년 6월 안드레아 음악학원을 운영했던 음악 집안의 2남1녀 중 막내로 태여났다. 친형 전항 역시 세샘트리오의 리더로 명성이 높았던 대중 가수였다. 자유로운 음악환경은 어린 시절부터 직업가수를 꿈꾸게 했다.

공부보다는 기타 배우기를 더 좋아해 청량공고 졸업 후 곧바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이태원은 1948년 5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에서 1963년부터 5년간 체신부차관을 역임했던 이진복과 전형적인 촌부였던 모친 박명금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음악하고는 백촌도 넘을 만큼 완고했다. 창경 초등학교 시절 이태원은 숫기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학예회 때만은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아 동요를 씩씩하게 불러 무대를 사로 잡았던 학교의 인기 가수였다. 경동중학에 입학해서도 성격은 여전했지만 대한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인 바로 위의 누나 이민자로 부터 외국 팝송을 접했다.

집안의 유일한 음악 친구였던 누나를 따라 레코드 가게까지 따라 다녔을 만큼 마음이 통했다. 특히 비틀즈, 롤링 스톤즈, 밥 딜런, 에브리 브라더스 등 당대 최고 록, 포크 가수들의 노래들을 좋아했지만 장르를 가리지 않고 냇 킹 콜, 짐 리브스 등 웨스턴스타일까지 접했다.

경동고 2학년 때 아버님의 눈을 피해 학교근처의 음악학원에서 전자기타를 몇 개월 배웠다. 실력이 붙은 기타솜씨는 소풍 때마다 친구들의 노래반주를 도맡아 해줘 늘 주위에 친구들이 몰려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버지가 차관인 모범생 이태원이 직업가수가 되는 상상을 못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 1966년 한양대 수학과에 입학을 했다.

2학년 때 ‘한양대에 기타 잘치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태원 미8군 UN클럽 5인조 록 그룹 <영 바이블즈>멤버들이 찾아왔다. 서울대, 성균관대생들로 구성된 그룹의 리더는 전설적인 오세은. 리듬기타를 치던 멤버가 군대를 가버려 대체멤버로 이태원은 합류했다.

롤링 스톤즈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외국 그룹들의 레퍼토리를 멋들어지게 연주해 내는 오세은의 기타솜씨에 넋이 나가며 더 넓은 음악세계를 경험했다.

이때 유엔 클럽에서 그룹 <포 가이스>의 리더 황규현과 만났다. 황규현은 각 그룹의 알짜 멤버들만 골라 1967년 말 우미회관 창립때 미군 해군 중사가 지어준 shagreen(푸른 상어)이라는 이름으로 5인조 록그룹 <쉐그린>을 창립했다.

당시 평균 개런티의 세배가 넘는 3만원 이상의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 처음엔 학업과 음악을 병행했지만 졸업을 포기했을 만큼 음악에 빠져버렸다. 플레이보이, 킹, 007클럽 등 미8군 클럽을 주무대로 활동하면서 미도파, 우미회관등 일반무대에도 진출을 했다.

필생의 음악배필 전언수는 이때 처음 만나 종종 마마스& 파파스등 감미로운 하모니의 레퍼토리를 듀엣으로 부르며 음악적 친분을 쌓아갔다. 황규현이 솔로로 독립해 나가려 하자 멤버들은 성공을 빌어주며 독집앨범 작업에 참여하며 4인조로 몇 달간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기타리스트 조동진도 탈퇴하며 팀이 와해되자 이태원, 전언수는 1970년 이필원, 이선, 정해붕과 함께 록그룹 <미도파스> 1기로 함께 참여하며 제2의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5/16 19:3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