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승무 인간문화재 이애주

혼의 몸짓으로 세상을 사는 바보 춤꾼

격렬한 몸놀림에 족두리가 벗겨졌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자갈들로 울퉁불퉁한 개천 바닥을 따라 내려 가던 그는 장삼을 더욱 세게 휘두르며 수면을 내리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속에서 그는 그대로 한 떨기 꽃이었다.

“천무(天舞)에요.” 지난해 12월 31일 전등사에서 가졌던 공연 ‘해넘이 공양’때 횃불을 환히 켜놓고 장삼 자락 휘날리며 췄던 춤이다. 불빛과 눈발이 어우러진 경내에서 췄던 춤을 서울대 저수지 안에서 재현한 것이다.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물속에서 자갈을 밟으며 춤을 추니 발은 아프고 시려온다.

그러나 지난해 해넘이 때는 그는 아예 얼음판 위에서 춤을 췄다. 뜨겁건 차갑건 가리지 않고 솟아 오르는 그의 몸놀림에 맨발의 이사도라 던컨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사위가 너무 아름다워 모든 게 춤으로 보였어요.”

5월 3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저수지에서 이애주(55ㆍ서울대 체육학과 교수)가 보였던 춤은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완전한 즉흥이었다. 20분 가까이 물속에서 춤추다 나와 한숨 돌린 그는 핏기 가셔 하얗게 된 입으로 “이렇게 춤 춘 것은 우리나라 무용계를 통 털어 처음”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의도한 바도 아닌데 그는 또 하나의 첫 장을 연 셈이다. 마치 1987년 그 때처럼.


무대 벗어나 사람과 부대끼는 춤사위

1987년 ‘6ㆍ29 평화 대행진 서울대 출정식’과 7월 9일 ‘이한열 장례식’때도 그는 바람맞이 춤(또는 시국춤)을 추었다. 당시는 뙤약볕과 운집한 학생들의 열기에 후끈 달아 오른 시멘트 바닥 위였다. 춤의 주인공이 교수라는 사실에 놀란 외신 기자의 타전 덕에 세계도 주목했던 이애주는 어찌 보면 솟아오르는 열정을 주체 못 하는 좌충우돌의 사람처럼 비칠 지도 모른다. .

1996년 12월 31일 이후로는 국가가 지정한 인간 문화재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乘舞) 한영숙류 보유자. 1969년 이수자, 1971년 전수자로 지정된 이래 그 동안 공백 상태였던 정통의 맥을 다시 이은 것이다.

인간 문화재급이 되면 전수 학원을 운영하는 등 보통 사람들과 격을 두기 일쑤인 여타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되도록 사람들과 어울리려 한다. “내 춤의 지향점은 무대를 벗어나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는 데 있어요.”

3월 17일 전남 연어사랑모임이 탐진강에서 2시간 꼬박 펼쳤던 연어 방류 대회 현장에서 그는 운집했던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마침 장날이라 강 인근에는 1,000여명의 구경꾼들이 모였다. 그의 장기인 살풀이를 기본으로 하는 즉흥무 ‘진혼굿춤’이 15분간 펼쳐진 뒤 이어진 길 닦음 대목은 감동의 도가니를 연출했다. 강 가운데를 가로 지른 폭 3m의 둑에서 펼쳐졌던 순서다.

둑과 똑 같은 길이의 광목 베 150마의 한가운데를 그의 몸이 살풀이 춤사위로 쫙쫙 가르며 나아갔다. 그렇게 끝까지 길을 펼친 그는 천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왔다. 이한열 장례식 때는 연대 정문 앞에서 그런 식으로 광목 30마를 갈랐다.

이 베가름 대목은 눈부신 베를 가르며 나아가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현장의 무게가 맞물려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동학군 진압의 원혼들을 위무한다는 의미도 곁들여진 이날 그는 막판에 이르자 온몸이 땀과 물에 푹 절어 영락없이 파김치였다, 다시 힘을 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연어를 뿌리는 대목에 이르러 춤을 추고 난 그의 주위로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갑자기 풍악소리가 멈췄다. 이애주가 나와 동백꽃잎을 흩뿌려 원혼을 위로하는 대목에서는 여기저기서 훌쩍임이 터져 나왔다. 공연에 걸렸던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승무 공연 40~45분의 두 배를 훨씬 넘긴 힘든 공연이었다. 끝나고 나서는 시루떡과 산채비빔밥으로 모두가 음복했다. 이렇게 그는 또 하나의 집단적 기억이 된 것이다.


우리 전통무용기법 전수에 열정

5월 8일~12일 춘천에서 열린 ‘2002 춘천 마임축제’에서는 일반인들을 위해 우리 전통 무용 기법에 대해 강연했다. 물꿈극장에서 가졌던 승무, 염불바라춤 강연이 그것이다. 그가 준비했다 나눠주는 자료는 그의 춤이 무엇을 지향하는 지 밝혀준다.

“소리 춤선은 단전호흡으로부터 시작, 오장의 소리를 내고 온몸으로 춤추며 몸과 마음이 하나돼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영가무도(靈歌舞蹈) 참선법이다.”그의 의식 깊은 곳은 이렇듯 진정한 우리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식민지 용어인 ‘무용’이란 말이 판치던 1970년대 초. ‘춤’이란 순 우리의 혁명적인 말을 쓴 것도 바로 그다.

생활인으로서 그에게는 춤뿐이다. 가족이 딸렸더라면 가능했을까. “집도 제대로 못 치우고 사는데 결혼은 무슨…” 미혼을 택한 데 대한 핑계를 해 본다. 교수로 한국과 서양 가릴 것 없이 전공 강좌를 맡고 있는 그에게 교육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찰 행사와 대학 바깥 강의가 줄을 선다. 조계사 옆 동산불교대(이사장 김재일 법사) 우리춤학과의 학과장이다. 현재 회사원 대학생 주부 등 30명의 학생에게 승무에 필요한 기본적 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춤의 기본 동작을 가르친다. 가르치는 맨춤, 바라, 살풀이 등 고유의 몸짓이 생활춤으로 소문 나더니 가끔은 화풀이나 술 마시고 속 풀이 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한 단계 더 높여 이 학교 염불만일회(회장 김재일)에 나가서는 본격 승무를 가르친다. 지난해 설악산 백담사에서 열렸던 만해축제(회주 오현 스님)에서는 “수처작주(雖處作主ㆍ어디를 가건 내가 주인이다)를 외며 사흘 꼬박 승무를 췄다. 신경림 시인이 교장으로 있는 시인학교가 함께 주최하는 자리라 더욱 신이 났던 것이다.

‘전통춤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스승 한영숙 선생이 세상을 뜬 1989년 그가 띄운 이 모임은 변변한 재정도 없어 과천의 공터에서 1주일 3번 연습을 이어 가고 있다. 실내에서는 연습 때 꼭 필요한 북 장단을 칠 수 없어 택한 고육책이다. 30여명의 회원은 전문적 춤꾼이라기보다는 기성 무용 단체나 학교 교사 등 보다 높은 춤 수련을 희망하는 사람들로 이뤄졌다.

또 한국종합예술학교에서는 전통무용과 무형문화재 종목 부문의 시간 강사로 변한다.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 한영숙류의 춤을 ‘한춤’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전수하는 자리다. 국제 민속축제(CIOFF) 한국위원회 이사이기도 한 그는 1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5월 국립극장에서 한국측 예술감독으로 무대를 총괄한다.


금강산에서 ‘천무’ 추고 싶어

“난 50년 동안 춤만 춰 온 바보에요”. 제자들 공부 시킬 수 있는 공간도 없어 후미진 곳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그에게 지금 자신의 춤 터 마련이 제일 급한 과제다. 뜨거운 현장만 찾아 다니다 보니 남들처럼 발표ㆍ제작 공간을 마련하는 일에는 너무나 소홀했던 자신을 탓한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자본주의ㆍ상업주의 시대를 너무 몰랐던 거죠.” 그 흔한 인터넷 사이트 하나 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신의 도메인 구축 작업에는 민족 문화 예술 기획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백현담씨가 기술적 도움을 주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민주화 운동 내력이 한몫 단단히 한다. 그는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알게 된 후배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의 동생이다.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찌르는 현장 맨 앞에 있었지만, 그는 감옥 신세를 져 본 적 없다. 지난 시절 그가 운동권의 대모인 것처럼 인식된 것은 검거된 수배자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누님”이라 불렀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뜨겁던 당시를 기록한 자료들은 그러나 형사들이 집안에 들이닥쳐 뒤집고 가는 바람에 모두 다 사라졌다고 한다.

이애주의 춤은 언제나 자연속에서 뜨겁게 살아 숨쉬는 인간과 함께 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충실한 현장제일주의다. 이른바 시국춤 역시 그 범주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짓이 물빛 그윽한 금강산으로 이어지길 간원하고 있다.

그 꿈은 1970년대 그가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유홍준 등과 함께 서울대 문리대 앞 카페에서 토론하던 중 굳어진 결심이다. 무용총의 고구려 벽화에 당시 그가 고민하던 우리 무용의 해답이 다 나와 있었던 것이다.

“동이전 ‘답지편(踏地編)’에는 승무와 꼭 같은 춤사위가 나오죠.” 그는 빨리 금강산에 가고 싶다. ‘금강산 천무’를 추고 싶기 때문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5/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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