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정치인은 연예인이 아니다

“인생은 연극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햄릿’에서 왕자 햄릿의 독백이다. 단역이든 주역이든 각자의 맡은 역할을 다하면 그것으로 삶은 보람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유명한 독백은 요즘 정치인들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정치인들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바꾸기 때문이다.

여야의 대통령 후보가 확정되면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본격적인 대권 레이스가 시작됐다. 레이스의 첫 관문은 6ㆍ13 지방 선거가 될 것이다. 이 후보와 노 후보는 이를 발판으로 대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기존과는 다른 변신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귀족적 풍모의 이 후보는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푼 채 서민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5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 후보는 갑자기 단상에서 대의원들에게 큰 절을 했다.

이 후보가 이날 대회에 아예 넥타이를 매지 않고 참석하려 했다는 소문도 정가에는 나돌았었다. 가톨릭 신자인 이 후보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성경 구절을 몸으로 실천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지방 순회 때 가능한 한 승용차 대신 버스를, 고급호텔 보다는 장급 여관을, 양복 대신 점퍼 차림을 애용하며, 생선을 다듬는 시장 아주머니 손을 덥석 잡는 것은 물론 흙이 묻은 오이도 그냥 먹을 정도로 변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후보는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 첫날인 5월 11일에는 용산구 서빙고동의 쓰레기 재활용작업장에서 환경 미화원들과 1시간 여 동안 청소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이 후보는 경선 캠프 해단식에서 “그 동안 낮은 자세로 다녀보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고, 새로운 것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를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대통령 집무실은 국민과 가까운 거리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밝히기도 했다. 이 후보의 변신은 오랜 판사 생활로 몸에 밴 권위적 풍모와 당 운영에서 독선적인 태도 때문에 ‘제왕적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항간의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한 제스처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은 이 같은 이 후보의 변신에 대해 “삶은 쇼가 아니다”라며 비난하고 있다. 김현미 부대변인은 “이 후보는 평생 근처에도 가보지 않던 일들을 연일 시리즈로 연출하고 있다”며 “비빔밥과 삼겹살 먹는 일까지 홍보가 되면 그 동안 이 후보는 도대체 뭘 먹고 살았던 것인지 오히려 궁금하다”고 비아냥댔다.

김 부대변인은 “국민은 이 후보의 연출이 아니라 살아온 삶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 후보도 “이 후보가 앞 치마를 두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귀족이 서민이 되는가. 나는 앞치마 두르지 않아도 그 자체가 서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노 후보도 너무 서민적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중산층 이상 유권자를 아우르기 위한 변신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 후보는 의식적으로 자주 양복을 입는 등 서민의 풍모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후보나 노 후보의 변신을 보는 시선이 고운 것은 아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 보다 정치인은 한 술 더 뜬다는 말이 있다. 인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정치인의 가장 끈 덕목은 인기 영합보다는 오히려 소신과 신념일 것이다.

물론 현 시대가 ‘탈 권위주의’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지의 변신만이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살아온 궤적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며 바꾼다 해도 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닌 표피적인 것이다. 우리는 두 후보에게 겉 모습이 아닌 정책이나 사고 방식 등에서 역대 대통령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장훈 주간한국부 부장

입력시간 2002/05/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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