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경복궁 자경전의 담벽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향원정(香遠亭)으로 가는 길에 문득 마주치는 아름다운 담장 있다. 말 못하는 벽 하나에도 세심한 정성을 쏟았던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문양과 그림을 수(燧)놓아 수 백년 세월을 뛰어 넘어 마치 살아있는 듯한 흙담. 바로 자경전(慈慶澱)의 담벽이다.

자경전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이전에는 원래 없었던 건물이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특별히 창경궁안에 커다란 집을 짓고 자경당(恣慶堂)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자경이란 자친(磁親), 곧 왕이 어머니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 경사(慶事)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고종 4년에 자경전이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고종이 정무를 보는 건물-편전(便殿)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승지들이 공무로 들기도 하였고, 진강(進講)-왕이 관인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고, 소견(召見)-고위 신하들을 불러 경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10년 12월에 큰 불이 나서 그 일대 전각들이 함께 소실되었다.

화재 후 다시 복원하였으나 1년 반쯤 뒤인 고종 13년 11월에 또 불이나 타버렸다. 이 때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겨 간 뒤에 자경전을 다시 지었다. 그 자경전이 조금씩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자경전의 담장이 다양한 문양과 그림이 장관이다. 거기에는 신라시대 의상(義湘)대사가 ‘화엄경’을 명쾌히 요약한 법성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해인도(海印圖)라고 불려지는 끝없는 진리의 세계를 상징한 도상(圖象). 깨달음의 세계로 뭇 중생을 인도하고자 노래한 스님의 독경이 1,300여 년 도도한 세월의 강을 건너 귓가에 쟁쟁하다.

“진리의 세계는 원만하여 두 모습이 아닌지라…” 210글자로 화엄경의 핵심을 노래한 이 해인도. 해인사란 화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은 가람이 건립되면서 점차 해인은 단순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용어에서 벗어나 마음 먹은대로 일을 이룰 수 있는 신이한 보물로 신비화한다.

이러한 과정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역사적 상처를 정신적 승리의 기록으로 소설화한 ‘임진록’의 이본을 통해서 확인된다. 즉 사명당이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에게서 받은 보물이 해인(海印)이라는 내용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수 있으며 원하는 물건은 모두 만들어낼 수 있다는 해인은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남조선에서 태어난다”는 ‘정감록’이라는 비결서보다 후대에 기록된 “진인이 해인을 가지고 남조선에서 나온다”는 ‘격암유록’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보물로 부각되었다.

동학 창도 이후 한국 신종교에서는 한결같이 해인을 가지고 있다거나 해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른바 교주들이 많이 출현했다. 지금도 해인을 신물(神物)로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원래 해인은 바닷속 용궁의 용왕 지녔던 신비한 도장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으신 경지를 설명하는 “바다가 삼라만상을 비추어내듯이 남김없이 밝음”이라는 뜻의 서술어이다.

스쳐 지나기 쉬운 담장 하나에도 이토록 깊은 사연이 배어있다. 경복궁을 찾는 이들이여! 선조들의 혜안과 간절한 소망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소서.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5/2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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