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한국화랑협회 임경식 회장

"작가의 혼까지 베낄수는 없죠"

"100% 진품인줄로만 믿고 있다가 위작이라고 하면 감정결과가 잘못된게 아니냐며 거세게 따지는 분도 있고, 이건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니 감정을 잘못한게 분명하다며 항의하러 오는 분도 종종 있습니다. 진짜라고 철석같이 믿다가 가짜라고 하니까 당사자들이 쉽게 믿지 못하는거죠. "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미술품에 대한 국내 유일의 감정기관인 한국화랑협회의 임경식(64.이목화랑) 회장을 만났다. 협회에선 최근 지난 20년간 현대미술작품들의 감정결과에 대한 통계분석을 발표해 세간에 작은 충격을 던졌다.

이들에 따르면 감정된 유명작가들의 작품중 약 30%가 위작이었다. 현재도 유명작가들의 고가 작품을 정교히 모사하는 위작전문가들이 다수 활동중이다. 가짜도 전문시대, 가짜를 진짜처럼 속이는 것이 문제다.

현재 협회내 감정위원회에서 활동중인 구성원들은 55명이다. 20년 이상 경륜과 믿을만한 안목을 가진 화상(畵商)들과 미술평론가, 교수, 작가의 유가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조사발표는 협회의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된 것이다. 회장을 통해 그간 감정위원회에 의해 실시된 작품들의 진위감정 주변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곳 협회에서 감정하는 작품대상은 서양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에 나온, 길어야 100년 안팎에 못 미치는 나이의 현대화들이다. 이들 그림에 대한 감정은 크게 시가감정과 진위감정으로 나눠지는데 그중 진위감정은 주로 개인의 의뢰를 받아 실시하게 된다.

지난 20년간 진위감정을 의뢰받은 작품은 2,500여점에 이른다. 그 사이 감정 결과들을 훑어보면 흥미로운 특징들이 나타난다. 가장 많은 의뢰를 받았던 작품은 고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들로 20년간 367점의 작품이 도마위에 올랐다. 감정결과 진품의 비율은 높았던 편이다. 약 70%인 252점이 작가의 진품으로 밝혀졌다. 유명한만큼 진품여부에 대한 불안도 컸던 셈이다.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은 이중섭 그림

작가중 위작에 가장 많이 시달린 사람은 단연 이중섭 선생이다. 의뢰받은 작품 189점중 진짜는 단 25%에 불과, 나머지 75%가 가짜였다. 진짜보다 가짜가 세 배나 많은 판국이다.

20년을 통틀어 단 서너점 정도만 들어왔던 김관호, 고희동 화백의 그림은 공교롭게도 감정을 의뢰받은 작품 모두 가짜였다. 때로는 전문감정인들도 손을 들 수 밖에 없는 '감정불능' 판정도 있었다. 그림의 훼손상태가 심하거나 부분적으로 엉뚱한 가필이 이뤄져있어 감정 자체가 어려운 경우다. 이러한 작품으론 나혜석, 황술조 화백의 작품 등 2점이었다.

" 옷이나 가방같은 명품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만큼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위작이 생기는겁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가짜가 전혀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제 값을 치뤄야 할 작품들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보려는 심리나 그런 컬렉터들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제 값 그대로 줬다면 이것이 워낙 고가이다보니 사기 전부터 아주 신중했겠지만, 어딘가 음성적인 유통시장에서 값이 싸게 나온 걸 보고 현혹돼 샀다가 본인도 계속 마음에 찜찜해 저희에게 들고 와 감정을 받아보면 가짜인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본의 아니게 속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화랑 주인도 진품인줄 알고 있다가 손님이 구입 조건으로 화랑협회 감정서를 붙여달라고 해 감정을 받는 과정에서 가짜로 판정나 놀라는 경우도 봤습니다. "

일단 진위 감정 의뢰가 들어오면 해당 작품이나 작가에 밝은 10명 내외의 전문가들이 모여 검토에 들어간다. 개인의 재산이 걸린 문제니만큼 엄중공정한 감정이 기본이다. 회의엔 담당 감정인들외에 출입 및 간섭이 철저히 통제된다. '외압'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협회 회장도 이 과정엔 참여할 수도, 간섭할 수도 없다.

심각한 회의가 시작된다. 웬만한 위작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걸러진다. 겉보기엔 아무리 그럴싸해도 작가 특유의 화풍까지 베껴내진 못한, 엉성한 위작들이다. 예를 들어 선의 속도감만 해도 작가의 진품은 힘있게 쭉쭉 뻗는다.

반면에 베껴그린 그림은 왠지 자신이 없고 불안한 붓놀림이 엿보인다. 일종의 '도둑이 제 발 저린' 심리 때문이다. 특히 그림 깊숙이 배어있는 작가의 혼은 아무리 손재주 좋은 위작자라도 똑같이 재생해 낼 수 없다.

그림으로도 애매하면 필적을 들여다본다. 작가의 필적엔 그림보다 더 확실한 단서가 들어있다. 작가의 필적까지 완벽하게 똑같이 베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웬만한 위작은 이 정도로도 게임 종료. 더 보고 말 것도 없이 감정인 전원의 만장일치로 어렵지않게 회의가 끝난다. 그러나 참석자중 단 한명만 이견을 내도 상황은 바뀐다. 회의는 연장되고, 감정위원들의 토론도 점점 치열해진다.

그림 자체로 가짜를 판별하기 어려우면 다음엔 재료들이 힌트다. 그 재료란 것도 여러 가지, 그림에 쓰인 물감에서부터 한국화에선 종이, 서양화에선 캔버스의 재질, 심지어 액자까지 샅샅이 훑어본다.

“예를 들면, 원래 유화 물감을 그대로 사용하면 그림이 번들거립니다. 그런데 유영국 화백의 경우엔 이것을 없애려고 그림을 그리기 전 미리 물감을 두꺼운 마분지에 짜놓고 그 마분지가 기름기를 다 빨아먹은 뒤에야 그것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번들거림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내용만 베껴 그린다면 똑같은 그림을 그리고도 담박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지요. 실제로 작가마다 어떤 종이를 즐겨 쓰는가, 어떤 물감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 그것도 연대별로 다양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액자도 그때그때 유행을 많이 타기 때문에 좋은 단서가 됩니다. 그런 작가의 개성이나 연대별 소재의 특성 등에 일치하는지 대조해보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


소유주 공백 생기면 ‘위작’의심

그래도 안되면? 그림의 족보 추적에 들어간다. 감정을 의뢰하러 온 당사자로부터 시작해 그 그림을 소장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역순으로 거슬러올라가며 그림이 건너다닌 경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거의 위조수표의 출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다.

재미있는 차이가 있다. 진품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든 소유주의 신원이 정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위작은 도중에 반드시 웅덩이가 생긴다. '기억이 희미해서 모르겠다'든가 '내 이전의 일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위작에 대한 의심이 더욱 짙어진다.

작가의 유가족 진술도 절대적이다. 작가의 생존시 집에서 부친 또는 모친이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의 여부 등을 철저히 확인한다. 고 김기창 화백의 작품인 경우 요즘도 그의 외아들 김완씨가 반드시 감정에 동석한다.

그림의 시료를 화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과학적인 기술까지 동원할 수 있는 고미술품 진위감정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눈과 머리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감정작업이다. 국내 현대미술작품들은 오래돼봐야 약 100년전에 그려진 것들이라 그 정도의 시간차로는 과학기술로도 별 두드러진 연대상 특징을 잡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워낙 오랜 기간 작품들을 감정하다보니 감정위원들에겐 위작전문가들의 정체까지 파악되고 있다. 작고한 위작전문가가 약 50명, 현재도 약 30명의 위작전문가가 활동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위작자들 가운데엔 공공연히 존재가 알려져 있는 사람도 있고, 이들 중엔 국전과 미술대전 등에서 입선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역량을 갖추고도 가짜로 전락하는 것은 백지 한 장의 차이 때문이다. 솜씨는 좋지만, 창의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짜다.

위작에도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작품값은 비싸고 베끼기는 쉬운 것,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그림이 최고의 집중 공략 대상이다. 김기창 선생의 청록산수가 가장 오랫동안 다량으로 베껴진 것도 그같은 맥락에서다.

청전 이상범 화백의 작품만해도 여름풍경보다는 겨울 설경이 더 많이 베껴진다. 같은 작가의 풍경화라도 여름보다는 설경쪽이 잎이나 색채를 베끼는데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러한 그림을 살 때 구매자는 더욱 조심을 해야한다는 얘기다.

" 작품이 가짜로 드러날 경우 작품가의 차이요? 살 때 얼마를 주고 샀든, 가짜가 밝혀지면 그대로 휴지가 되는거지요. 이런 점 때문에 감정인의 입장에선 더욱더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는겁니다.

위작임이 밝혀지고 나면 의뢰를 했던 분이 그 그림을 자신에게 판 사람에게 찾아가 변상을 요구하거나 그 과정에서 소송이 생기기도 합니다. 저희 협회의 감정인들도 그런 사건들 때문에 자주 검찰에 참고인 자격으로 불려가 증언해주곤 했습니다. "

임씨 역시 회장 임기가 끝나고 나면 감정에 참여할 계획이다. 그는 1962년 영남대 약학대를 졸업, 약 5년간 약사로 근무하다가 전업해 화랑가로 들어선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1976년 대구의 이목화랑으로 출발, 1990년 서울로 옮겼다. 한국화랑협회 초창기부터 동참해 지난 2000년 회장으로 선임됐다.


‘그림은 사치품’인식이 가짜 양산

이번 조사발표를 통해 그는 작가의 저작권에 대해선 사회적 인식을, 위작전문가들에겐 경종을, 일반인들에겐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위작이 양산되는 것도 일면 그림에 대한 일반인들의 막연한 환상이나 오해가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아직도 화랑의 문턱이란 높고, 그림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사는 사치품이란 인식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미술이 사람들과 친해지기가 힘들다. 결과적으로 화랑의 경제까지 흔들거린다. 불경기가 닥칠 때는 제 1착으로, 호경기가 올 때는 맨 꼴찌로 상황이 풀리는 곳이 화랑가다.

다들 경기가 나아졌다며 골프장, 해외여행지로 줄을 잇는 요즘에도 화랑들 상당수는 아직 IMF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미술을 비롯한 기초예술분야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정부의 지원이 그는 아쉽다. 그리고 조언 한마디.

" 좋은 그림을 고르는 기준은 다른게 아닙니다. 누가 그렸든, 어떤 이름이 붙었든 자기 눈에 좋으면 그게 최고로 좋은 그림입니다. "

협회에선 매월 둘째,넷째 수요일마다 작품감정 의뢰를 받고 있다. 진위감정 수수료는 작품크기에 상관없이 작고한 작가의 경우 1점당 40만원, 생존 작가의 경우 25만원이다. 가짜와 진짜가 뒤범벅인 사회. 완전히 무심해지거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거나 선택은 둘 중 하나일 듯 하다.

입력시간 2002/05/2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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