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주축을 주책으로 바꾼 '주책'

고3때도 안 해봤고, 애 키울 때는 물론이고 대학원 다닐 때도 안 해본 걸 나는 지금 매일 하고 있다. 바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는 일이다. 학교 때 나를 알던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며 고개를 저을 일이다. 벌써 KBS 제 1 라디오 '지구촌 오늘'에서 간추린 국제 뉴스를 맡은 지 5달 째다.

나의 오전 일과는 잔뜩 당겨진 고무줄처럼 타이트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커피를 끓인다. 손에는 따끈한 커피를 들고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켠다. 멍청하게 보내는 시간도 많지만 일을 할 때는 대개 2, 3가지를 한꺼번에 해치운다.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리며 갓 세수한 얼굴에 로션을 바른다. 이제 서핑이 시작된다. 즐겨찾기에 올려놓은 순서대로 한바탕 검색이 시작된다. 야후로 CNN으로, 뉴욕 타임즈, LA 타임즈, BBC을 본다. 다음은 한국 조간 신문들을 살핀다.

그래도 아직 잠은 덜 깬 상태다.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주워 담는 식으로 빈 문서에 담아 출력을 한다. 출력이 되는 동안 식구들을 깨운다. 아침을 차리면서 TV 뉴스를 듣는다. 5학년인 재윤이가 준비물은 다 챙겼는지, 이는 잊지 않고 닦았는지, 머리는 빗었는지 확인을 한다.

10여분 걸리는 출근길엔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방송국에 도착하면 그 때부터는 사인펜과 키보드와 씨름한다. 일단 사인펜으로 오늘 할 부분을 골라 사각사각 동그라미를 친 다음 원고대에 올려놓고 바로 번역에 들어간다.

다행히 한글로 이미 기사화 된 내용은 긁어서 정리해도 되지만 우리 프로그램의 특성 상 조간 신문에 난 소식 재탕은 자존심이 상해서 되도록 안 하려고 애를 쓴다. 뭐 한가지라도 추가로, 가장 최신 소식을 전하는 것이 우리 프로그램의 특성이기 때문에 아침 7시 15분부터 8시 30분까지는 초싸움이 벌어진다.

오늘 내가 전한 소식이 내일 조간 신문에 나는 것, 그것이 나의 지상 목표다. 작가도 없이 스튜디오 옆방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지구촌 오늘' MC 성기영 아나운서와 전화해서 내용이 겹치지는 않는지, PD에게 물을 것은 물어가면서, 한 바탕 다다다닥 소리를 내면서 원고를 정리한다.

일단 원고가 완성이 되면 출력을 눌러놓고 다시 한 번 서핑을 한다. 혹시 그새 새 소식이 나오지 않았나 확인을 한다. 그 다음은 원고를 들고 뛴다. 8시 30분 경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어떨 땐 미리 한 번 읽어볼 시간이 없을 때도 있다.

통역이나 영어 인터뷰가 필요한 출연자들이 있으면 일과가 송두리째 뒤바뀌어 버린다. 아침에 하는 내 코너 방송은 방송대로 하면서 뭔가 추가로 하나 더 하게 되면 혼자서 외줄타기에 들어간다. 나의 생체시계가 아직 4시반 기상을 힘겨워하는 마당에, 이렇게 되면 몸과 마음이 초긴장 상태가 된다.

전날 질문지를 만들고 인터뷰할 사람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지만 역시 생방송 통역은 아주 잘해야 본전이다. 용어를 유심히 보고 인터뷰 내용에 대한 배경지식을 검색한다. 각 지방 방송국에 나갈 외신이나 화제를 번역하고 정리하고 나면 어느 새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 된다. 난 오전반, 오후반인 박성우씨가 오면 난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을 한다.

실수도 많이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원고에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를 고이즈미 대통령이라고 써 보내서 하늘같으신 박찬숙 위원님을 당황하게 만드는가 하면, '누구누구가 주축이 되어 무슨 일을 한다' 라는 부분을 '누구누구가 주책이 돼서.. '라고 말하는 주책을 범하기도 했었다.

통역 얘기를 자주 해서 그런지 홍역을 치르고 있다는 대목에서 통역을 치르고 있다고 하질 않나. 천수이벤 현 총통과 리덩후이 전 총통을 말하면서 천 현 총통과 이 전 총통 이 마구 발음이 꼬여 엉망이 된 일도 있었다.

그래도 난 이런 팽팽한 긴장이 좋다. 축 늘어진 백곰같이 힘없이 다니는 내 모습은 상상하기 싫다. 머리 꼭대기까지 쭉 뻗치는 긴장을 즐기면서 난 오늘 아침에도 손에는 커피를 들고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켠다.

김 윤숙 KBS 라디오정보센터 동시통역사

입력시간 2002/05/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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