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남성 포크듀오 쉐그린(下)

추억을 에돌다 간 시련과 환희의 시간들

그룹 <미도파스>시절 이태원과 전언수는 듀엣으로 TBC 등 방송에 몇차례 출연,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그룹의 리더 이필원도 미도파 살롱 사회자 박인희와 혼성듀엣 <뚜와 에 무와>를 결성해 독립하자 둘만의 음악활동을 마음에 두고 있던전언수, 이태원도 흔들렸다.

해체한 그룹 <쉐그린>멤버들은 ‘언젠간 다시 모여 음악을 하려면 그룹의 이름을 보존해야 한다’고 마음을 모았다.

1970년 중반 이태원과 전언수는 남성 듀오 <쉐그린>으로 거듭났다. 차도균 등 여러 가수들의 노래가 실린 컴필레이션 음반에 번안곡이 수록된 첫 음반을 냈다.

곧 이어 독집 앨범은 아니었지만 우미회관 연예부장 엄진이 작사 작곡에 편곡까지 도맡은 <김준.쉐그린-유니버샬.KLH27.70년11월>음반에 창작 포크곡 <추억>등 6곡을 발표했다. 경쾌하고 달콤한 멜로디의 노래들은 다방과 살롱가 등 다운타운가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쉐그린은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집중 조명되며 한국의 <사이먼과 가펑클>로 불리어졌다. 11개 중고교에는 팬 클럽까지 결성되는 등 깡마른 전언수는 ‘꽁치’, 이따금 말을 더듬는 이태원에겐 ‘더듬이’라는 애칭까지 붙여주었다. 쉐그린은 <트윈 폴리오> 이래 최고의 포크열풍을 몰고 오며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1970년 말부터 쉐그린은 정성조와 손을 잡고 신중현의 <봄비> 등 비트 강한 록 사운드를 포크에 접목하는 새로운 대중가요의 물결에 시동을 걸었다. 연속적으로 발표된 음반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1971년 5월 29일 YMCA강당의 첫 리사이틀은 절정의 인기를 확인해준 젊은 열기가 뜨거웠던 한 마당이었다.

<미련><그리움>등 신곡과 인기 포크송 메들리로 꾸며진 공연엔 남성 포크 듀오 투 에이스와 양희은,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찬조 출연해 2,000여명의 극성 팬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공연후 2층 계단을 타고 건물 밖까지 수백 미터를 늘어선 팬 사인회는 2시 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을 만큼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나 시련이 찾아왔다. ‘작곡자 엄진이 일본곡을 카피 했음’이 들통나자 인기 절정의 데뷔 곡 <추억>은 왜색가요로 낙인 찍히며 방송 금지조치까지 내려졌다. 인생관이 다른 두 사람은 첫 음악적 시련에 빠지며 침몰했다. 오랜 기간의 활동에 권태기가 찾아오자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결별 후 1973년 이태원은 조동진 곡 <마지막 노래>로 첫 독집 음반을 내며 방송활동에 주력했다. 전언수도 솔로로 독립, <미소-신세계>등 자작 곡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했다. 솔로 활동은 1년 정도 지속되었지만 종로에 음악살롱 <쉘브르>가 오픈하며 재결합했다.

절친했던 DJ 이종환의 강력한 권유가 주효했다. 1975년에 발매된 쉘부르 기획작품1집 음반 <쉐그린(막내들)-얼간이 짝사랑.JLS120955.지구>는 데뷔초기의 인기를 부활시키며 <기다림><밤은 가고>등 여러 곡이 동시에 히트하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요정화운동으로 일컫는 대마초 파동에 두 사람 모두 연루되면서 또다시 좌절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이태원은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막내 매형의 옷 도매상 회사에서 잡일로 소일하다 1978년 귀국해 세운상가에서 가스레인지와 싱크대 사업가로 재기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전언수는 생계를 위해 친형인 전항, 권성희와 <세샘 트리오>를 구성하며 음악적 변신을 꽤했지만 82년 음악활동을 접고 파라과이로 이민을 간 후 어렵게 미국에 정착을 했다. 금지족쇄는 1980년에 풀렸다.

고무신 장사로 거덜난 이태원은 1982년 오아시스 박성규 문예부장과 이종환의 도움으로 독집음반<솔개><여인아>을 발표하며 부활했다. 정동 부근의 에버그린 홀에서 열린 조촐한 신곡발표회에는 서유석 등 200여명의 동료들이 커피 접대를 자청하며 축하했다.

이태원은 솔로활동 때 발표한 솔개, 고니, 타조, 까치, 앵무새, 도요새 등 일련의 새 시리즈 노래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서동숙 아나운서가 중간에 시를 낭송하는 자작곡 <그대>는 지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트곡일 만큼 성공적인 컴백을 했다.

1983년 방배동에 까페 <솔개>를 오픈하며 자유로운 스타일로 인생과 노래를 즐기던 이태원. 1998년 위 수술에 이어 뇌수술까지 받으며 삶의 최대 고비를 넘겼다. 수술 전 마지막이라는 절박감으로 한 달간 작업을 강행했던 자작 곡 <인생이란>이 유작이 될 뻔 했다.

1999년 전언수가 뉴욕 한인타운에 까페 <쉐그린>을 오픈하면서 두사람은 눈물겨운 재회를 했다. 이후 해마다 김세환, 신형원등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 교포들의 추억을 달래주는 공연을 뉴욕에서 열고 있다.

이태원은 ‘나를 포함한 통기타 1세대들은 아무런 발전을 이뤄내질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쉐그린이 남긴 생기발랄한 노래들과 포크록의 야심찬 실험은 영양가 높은 음악적 토양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중년 세대들의 가슴속에 젊은 날의 <추억>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5/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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