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김정일 아버지의 역사를 접은 아들과 딸

역사적 만남, 동병상련의 교감 나눠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 만큼 불구대천의 원수가 또 있을까.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이 집권한 1961년 5ㆍ16 쿠데타부터 79년 10월 26일까지 18여년 동안 그야말로 ‘결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었던 철천지 원수’의 관계였다. 특히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자신을 살해 하려한 68년 1월21일 청와대 습격사건이나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등으로 김일성 주석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 다 고인이 되고 세상이 바뀌어 그들의 장녀와 장남이 어느덧 아버지들의 연배가 되어 손을 맞잡았다. 5월 13일 평양에서 열린 박근혜 의원(한국미래연합 대표)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회동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아 우리 분단사를 복잡하게 투영했다. 외신들은 ‘남북 독재자 자녀의 회동’이라고 보도했으나 결코 간단치 않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김정일 전용기 이용등 국빈급 예우

김 위원장의 박 의원에 대한 예우는 국빈을 방불할 정도로 깍듯했다. 김 위원장은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고려항공편으로 방북을 추진 중이던 박 의원 일행 4명에게 자신의 특별전용기를 보내줬다. 이 비행기는 50인승으로, 고려항공 소속 여객기가 아니라 김 위원장과 그 수행원 만이 이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 의원은 2000년 6ㆍ15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묵은 백화원 초대소의 객실에서 묵는 영광을 누렸다. 박 의원의 동선에는 김용순 노동당 비서 등 대남 실세들이 대거 출연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을 방문했을 땐 1,000명의 어린이가 특별 공연을 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은 박 의원을 ‘국회의원이며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 여사’라고 극존칭했고, 특히 5월 14일 자정에 김 위원장의 면담 소식을 전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박근혜의원 제의 대부분 수락ㆍ찬성

김 위원장은 단독 면담 1시간, 만찬 2시간 등 총 3시간 동안의 만남에서 박 의원의 제의에 ‘찬성한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서울 답방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고, 국군 포로의 생사확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에도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김 위원장은 그 동안 수없이 많은 당국간 회담에서 풀지 못했던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문제에 대해서도 “동해선 철도 연결 전에 금강산 육로를 뚫어 적당한 곳에 설치하면 된다”고 구체적인 언질을 줬다.김 위원장은 현재 남북관계 교착의 원인 중 하나인 금강산 댐 안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 민간 전문가들의 공동 조사에 응하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김용순 비서가 “남측 언론이 우리 군인들이 피땀 흘려 만든 금강산 댐의 부실문제를 제기해 경협추진위 2차 회의가 열리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민감했던 사안이 단번에 해결된 셈이다. 김 위원장은 덤으로 9월초 북측 축구대표팀이 남북직항로를 이용해 방한하고 11월 중 북측 가요 ‘휘파람’의 가수 전혜영이 소속된 보천보 전자악단이 남한에서 공연하는 내용의 제의를 수락했다.


아버지들 합작품 7ㆍ4공동선언으로 화해

김 위원장은 과거에 대한 회고와 반성을 통해 박 의원을 포용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상당히 많이 발전시켰다”고 추켜세운 뒤 1ㆍ21 사태에 대해 “(북한 내)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지른 것”이라면서 “그때 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죄를 받았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조총련계 문세광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에 대한 사과는 받지 못했으나, 과거사에 대한 응어리는 어느 정도 풀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아버지들이 남긴 유일한 합작품인 72년 7ㆍ4 공동성명으로 되돌아갔다. 이 성명이 밀알이 되어 6ㆍ15 공동선언이 성사됐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고, 힘을 합쳐 평화통일을 이루자고 약속했다.

김 위원장은 즉석에서 “번거롭게 중국을 거쳐 가지 말고 판문점을 통해 가라”고 말해, 정확히 30년 전 당시 박 대통령의 특사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공동성명에 합의한 뒤 돌아간 그 길을 터줬다.

김 위원장이 이처럼 박 의원을 환대한 데는 아버지 김 주석과의 대결에서 판정승했으나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 박 대통령 혈육에 대한 연민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싸우면서 닮는다고 박 대통령과 김 주석 사이엔 비슷한 점도 많았다. 72년 10월 박 대통령이 최대의 실패작으로 꼽히는 유신을 선포하자, 그 해 12월 김 주석도 주석체제를 도입한다.

새마을 운동과 천리마운동, 자주와 주체, 예비군과 노동적위대 등도 따지고 보면 서로 비슷한 아이디어였다. 둘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토양 위에서 잘 살고 힘 있는 나라 만들기에 사활적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아버지들의 애증의 투쟁을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지켜봐야 했던 박 의원과 김 위원장도 서로가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들의 유훈을 발판으로 정권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고, 또 정권을 쟁취한 지금도 동병상련의 태생적 업보를 갖고 있다.


남측 정치상황 고려한 교란책 관측도

물론 두 사람이 현재를 덮고 과거에만 집착했을 리 없다. 김 위원장은 보수적 색채의 박 의원과의 대화를 통해 ‘인덕정치, 광폭정치’의 유연성과 평화의지를 만방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신당 창당 등 정치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박 의원은 대북문제에도 정통한 차세대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었다.

특히 둘의 만남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에도 미묘한 파장을 끼칠 듯하다. 북한이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에 대해 맹비난하면서 같은 보수진영인 박 의원을 환대한 것은 남쪽 보수세력의 분열을 노린 고도의 전술이라는 해석도 있다.

김 위원장이 각 당 대선후보의 지지율 변화수치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는 점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는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할 대북정책이 대선 국면에서 논란에 휩싸여 국내정치의 종속변수로 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두 사람이 약속한 많은 약속들이 실질적인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이다. 무엇보다 박 의원은 정부차원에서 공식 방문한 게 아니었다. 박 의원도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 없다”고 밝혀 사실상 면담성과를 정책으로 연결시키길 포기했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김 위원장이 박 의원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질문한 내용에 대해 원론적 수준의 언급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진단했다.

박진석 사회부 기자

이동준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2/05/23 16:06


박진석 사회부 jseo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