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귄터 그라스와 월드컵

세상은 그를 ‘양철북’의 작가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5월 25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의 신작소설 ‘게걸음으로 가다’가 나왔음을 은근히 알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전야제 축시 낭독이 방한의 주목적이 아님을 비친 것이다.

그는 20세기 마지막 노벨 문학상을 탄 ‘나의 세기’의 작가 귄터 그라스다. 무척 축구관전을 좋아 한다. 2차 대전의 시발점이었던 단치히 자유도시 출신으로 올 75세인 그는 자신의 ‘세기’만큼 변환 많은 독일 정치문화의 분열상 묘사를 좋아한다. 히틀러의 유겐 출신인 그는 1944~46년까지 공군 보조병, 전차병으로 참전했으며 미군에 포로가 되기도 했다.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을 나와 1958년 ‘양철북’을 썼다. 금속 조각가이기도 하고 갱부, 석공 등 노동판에서도 일했다. 그가 가장 좋아 하는 것은 ‘양철북’이지만 ‘나의 세기’, ‘게걸음으로 가다’에서 즐겨 사용하는 ‘그’와 ‘나’와 ‘사람’이란 3자속에 펼쳐보이는 분열된 독일 정신문화이다.

소설 작법상 ‘그’와 ‘나’나 ‘사람’은 그라스 자신일 때도 있고 동독인일 때도 서독인일 때도 있다. ‘양철북’에서는 한국적인 미생원(未生怨:부모나 조상이 저지른 원한이 살아있는 나에게 미친다는 숙명론)에 근거해 단치히 자유시 점령 시절인 나치시대의 암울을 전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 후 나온 ‘게걸음으로 가다’에서는 통독 후 극우, 스킨헤드, 네오 나치주의자가 등장하는 독일이 섭리(히틀러는 독일의 숙명에 대한 지도자)에 의한 것인가. 자기 분열적 독일 문화의 모순에 의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는 ‘나’는 그라스며 ‘나’라는 화자의 아들이 어떻게 독일의 숙명과 섭리를 폭력이나 암살이나 테러 없이 해결하는 것인가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는 중도 좌파의 참여 문학인이다. 그래서 ‘나의 세기’에 나온 1900~1999년까지 100 장면에는 갖가지 정치, 사회, 문화적 사건이 해마다 요약되어 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독일이 세 번째 우승했을 때 ‘나의 세기’에는 이 대목이 없다. 대신 동독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민주주의 선거가 1990년의 테마다.

왜 그랬을까. 그라스의 이번 서울 방문은 ‘통일과 문화’ 심포지엄에서 ‘독일 통일에 대한 성찰’의 기조연설을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월드컵이 분단 국가에 주는 통일에의 영향, 문학인에게는 무엇인가를 다시 느끼려는 작가의 노숙한 염원이 아닐까.

1954년 서독은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에서 2차 대전때 침공했던 헝가리를 3대 2로 누르고 우승했다. 그라스는 ‘나의 세기’의 ‘1954년’ 대목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세계 챔피언이다. 우리는 온 세계 만방에 보여주었다. 우리가 건재함을. 더 이상 전쟁의 패배자가 아님을. 우리는 베른의 축구장에서 우산을 쓴 채 노래를 부른다.”

1954년 5월 제네바에서 한국, 인도네시아의 분단 문제를 토의하는 19개국 회의가 열렸다. 유엔을 통한 남ㆍ북한 평화통일. 남ㆍ북 베트남의 분할이 이 회의에서 결정 되었다. 그라스는 그러나 당시 서독 의 월드컵 우승 의미를 이런 국제 문제의 소용돌이 밖으로 끌어 냈다.

그라스는 묻고 있다. 결승전에서 영국인 주심 링이 3대 2에서 헝가리 푸스카스의 후반 종료 직전 슈팅 순간, 오프사이드를 부르지 않았다면 서독 축구의 장래는, 통일은 어찌 되었을까. 서독은 이 월드컵을 통해 패배자의 늪에서 헤어 났다.

이후 20년이 지나 1974년 서독은 다시 뮌헨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챔피언은 독일이 아니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인 서독이었다.

‘나의 세기’의 ‘1974’년 대목은 브란트 총리가 5월 5일 그의 보좌관 귄터 기욤(1995년) 스파이 사건으로 사퇴하고 8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자진 사임하는 속에서도 월드컵을 다루고 있다.

이해 6월 22일 함부르크 민중공원에서 열린 동독과 서독의 예선전에는 6만 명이 몰렸다. 그라스는 이날 어느 독일을 응원해야 하는가의 고민을 동독의 간첩혐의로 수감중인 기욤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기욤은 후반 들어 동독이 한 골을 넣자 “골인! 골인 골인!”을 외쳤다.

그러나 저쪽 독일(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여러 차례 공격을 기도하자 감옥의 다른 죄수들과 함께 ‘저쪽 독일’을 응원했다. 동독을 위한 간첩 행위를 한 기욤은 자신에게 묻고 있다. “1대 0으로 독일이 이겼다.

한데 어떤 독일인가, 저쪽이 내 독일인가.” 그라스에 의하면 기욤은 브란트에게 “동독에게 서독이 진 것으로 끝난 것이 유감”이라고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브란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라스는 “브란트가 기욤같이 어느 독일이 승리 했느냐”는 뒤섞인 감정 때문에 편지하지 않았을 것으로 봤다.

어떻든 서독은 74년 월드컵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동독은 서독과의 대전에서 이겼지만 월드컵을 차지 하지 못했고 그후 흡수 통합됐다. 그라스는 한국이 통일을 길게 보고 갑작 스런 통일 후 또 다른 분열상을 가져올 ‘게걸음’을 하지 말 것을 바라고 있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6/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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