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히딩크 감독을 이용하지 말라

거스 히딩크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 감독의 리더십이 화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와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짐에 따라 히딩크 감독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년 6개월 전 대표팀을 맡은 히딩크 감독은 그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대표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조직과 체력을 다지는 등 특유의 리더십으로 팀을 세계 수준급으로 올려 놓았다.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 여부를 떠나 히딩크 감독의 용인술과 소신 등은 웬만한 기업의 CEO들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때문에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에 대한 책이 나오는가 하면 기업들도 히딩크의 조직관리 능력을 벤치마킹 한다는 말도 들린다. 또 정치인들도 지방 선거 유세에서 히딩크 감독처럼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히딩크 감독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만약 우리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한다면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인으로서는 조선 중기에 표류해온 하멜 보다도 더 유명한 인물로 한국인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세계 60억 인구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은 축구다. 축구 때문에 전쟁이 일어 날 정도로 열광하는 나라들이 많다. 독재 국가들은 이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축구를 정치에 이용하는 등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방편으로 종종 활용해왔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의 사례를 봐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박스컵’을 개최하는 등 축구로 국민적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를 해왔다. 당시 국민들은 우리 대표팀이 이 대회에 참가한 축구 강국들(?)을 연파하고 우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열광하기도 했다.

박 전대통령은 이 대회 개막식에서 시축하는 등 축구를 사랑하는 지도자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키고 국민들이 독재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축구를 교묘히 이용했던 것이다.

21세기의 첫 월드컵이 우리 나라에서 개막되고 갈수록 축구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정치권도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6ㆍ13 지방 선거에 활용하기 위해 분주하다. 각 당은 월드컵 열기가 지방 선거에 미칠 영향과 유ㆍ불리 등을 분석하면서 ‘월드컵 표심’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월드컵 개막식에 나란히 참석하는가 하면 우리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축구 열기에 편승해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한나라당은 “젊은 층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보다 월드컵 경기장을 찾거나 TV 시청에 매달릴 가능성이 높은 만큼 불리할 것이 없다”, “월드컵 열기로 대통령 친인척 비리의혹 등의 문제가 덮이게 되면 유리할 것도 없다”는 등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민주당은 대통령 아들 비리 문제로 지지도가 저하돼 있는 상황에서 16강에 진출할 경우 분위기가 일신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16강에 진출한다면 세계 축구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 된다.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이다. 특히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은 일약 ‘영웅’반열에 오를 것이다.

때문에 이회창 후보나 노무현 후보 모두 이 같은 호기를 이용하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후보가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에 어떤 기여를 했을까. 막말 경쟁을 하고 있는 두 후보는 과거 정치 지도자들이 스포츠에 보여준 행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우리 나라 선수들이 외국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우승만 하면 제일 먼저 축전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예 언론에서는 전 전대통령이 우리 팀이 우승할 때 축전을 보낼 것을 예상해 우리 팀이 우승하면 청와대가 발표하기도 전에 미리 축전을 보냈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쓴 기사가 틀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21세기의 첫 월드컵 개최와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은 역사에 남을 일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월드컵 예선도 통과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 히딩크나 우리 대표 선수들이 정치권의 농간에 이용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축구의 승리는 감독과 선수들의 몫이지 정치인들의 몫은 아니다. 정치에 식상한 국민들도 축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이지 정치인들이 끼어 드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 대표팀이 16강 문턱에서 탈락하면 정치인들은 하루 아침에 히딩크 감독을 외면할 것이지만, 축구팬들은 그래도 히딩크 감독을 기억할 것이다.

이장훈 부장

입력시간 2002/06/0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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