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르포] 시민권이 뭐길래…원정출산 러시

중산층으로 급속 확산, LA 한인타운 산후조리원 문전성시

LA한인타운에도 때아닌 원정출산 바람이 불고있다. 과거 일부 부유층 자녀들의 전유물로만 인식됐던 원정출산이 최근 1∼2년 새 중산층주부들에게까지 급속도로 확산돼 한인타운의 산후조리원과 하숙집들은 원정출산을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임산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특히 9·11테러의 후유증이 잠잠해 진 올해 초부터는 이들 산후조리원 시설의 60%이상을 원정임산부들이 차지할 정도로 러시현상을 이루고있다.


원정산모는 월평균 20여명

임신 9개월째인 김모(34.서울)씨는 지난 3월말 둘째 아들을 낳기 위해 LA에 왔다. 남편의 유학시절 미국에서 첫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둘째도 미국에서 낳겠다고 마음을 먹고 LA에 있는 친구와 상의를 해 원정출산을 감행했다.

김씨는 LA물정에 비교적 밝았던 터라 비용절감을 위해 출산 전에는 친구 집 근처의 월세 아파트에 머물고 출산과 동시에 산후 조리원에 입원하도록 스케줄을 짰다.

비록 남편과 4개월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태어날 아기가 미국 시민권을 받으면 조기유학부터 병역문제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희망에 두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무거운 몸을 비행기에 실었던 것이다.

한인타운내 산부인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한인타운 인근의 4개 종합병원 분만실에서 출산을 하는 원정 산모는 월 평균 20여명. 매년 LA카운티에서 태어나는 한인신생아 수가 2,000명이 조금 넘는 점을 감안할 때 전체 한인 신생아의 10%이상이 이들 산모들에게서 태어나는 셈이다.

최근 LA타임스가 한국 내 병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 '연간 한국 신생아의 1%인 5,000명이 미국에서 원정출산으로 태어나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이 숫자는 한해 동안 미국에서 태어나는 전체 한인신생아 통계 등을 감안할 때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산후조리원에서도 원정출산 러시현상은 쉽게 감지된다. 산후조리원인 '라치몬트 빌라'를 운영하고 있는 하나병원 관계자는 "한국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지에서 원정출산을 오는 산모들이 매달 평균 15명에 이른다"고 말했고 두 달 전 산부인과를 개원한 한국병원 관계자도 "지난달에 벌써 원정출산 온 산모가 무사히 분만을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또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원정출산 오는 산모가 너무 많아 이젠 산부인과에서나 종합병원에서 이들을 만나는 게 일상적인 일이 됐다"고 했으며 베벌리 분만센터 부설 '베벌리 산후조리원' 관계자는 "올 들어 원정출산 온 산모들이 전체 입원자의 70%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원정출산이 줄을 잇자 산후 조리원의 서비스도 한국서 오는 산모들 위주로 변했다. 하나병원 측은 인터넷 웹사이트(www.birthinusa.com)에 원정출산에 관한 정보일체를 상세히 제공하면서 이메일을 통해 산모 개개인의 궁금증을 그때그때 풀어주고 있다.

특히 이 웹사이트는 예약과 비용, 비행기 탑승시기, 동반가족의 숙소와 관광, 미국여권 및 출생증명서 발급절차와 언어연수프로그램까지 자세히 안내하는 등 웬만한 유학원이나 여행사의 기능까지 대행한다.

산후 조리원에 밀려드는 예비 산모들의 이메일 문의내용을 보면 원정출산 열기가 얼마나 확산돼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사무소 연락처는 없나요'(ID 이주희) '출산 전에 영어공부를 할 기회는 없나요'(ID 최동희) '산후조리원 별관 신축공사는 언제 하나요'(ID -) '임신 28주째인데 지금도 가능한가요'(ID 김소슬) '같이 갈 친구를 구합니다'(ID 김정연) '산전에 아파트 같이 쓰실 분을 찾습니다'(ID 예비맘) 등 질문내용도 매우 구체적이다.


1만달러 이상 소요, 원정출산 '계'까지

한인타운 인근 라카냐다의 한 친지 집에 머물며 이 달 21일로 예정된 출산 일을 기다리고 있는 주모(29.서울)씨는 원정출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처녀 때부터 부어왔던 정기적금을 털었다고 했다. 병원비와 산후조리원 입원비, 항공료, 체제비 등을 패키지로 묶어 약 1,300만원(1만달러) 정도를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예산을 초과할 것 같다는 게 예비엄마의 설명이었다.

서울에 있는 것과 비교해 출산비용이 너무 비싸지 않느냐는 질문에 주씨는 "모두 아기를 위한 것 아니겠느냐"며 "주변에는 '원정출산 계'를 시작한 친구들까지 있다”고 대답했다.

남편이 회사원이라고만 밝힌 박모(33)씨는 "지금은 친구 집에서 지내고 있는 데 출산을 하면 산후 조리원에서 2∼3주정도 있다가 돌아가려고 한다"며 "비용의 절반은 적금에서, 나머지 절반은 친정부모에게서 받아 충당했다"고 말했다.

이 달 29일이 출산 예정일인 그녀는 "가족친지와 떨어져 애를 낳게 된데다 출산 일에 맞춰 오기로 돼 있는 남편이 아직도 비자를 못 받고 있어 사실 좀 불안하다"고 말했다.

한인타운내 산후 조리원 입원료는 출산 전이 1박에 약 18만원(140달러), 출산 후가 1박에 약 32만원(250달러) 정도 들어간다. 대부분의 산후 조리원들이 산모가 10일 이상을 머무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산후조리에 들어가는 비용은 최소 320만원(2,500달러)이 된다.

그 것도 쌍둥이를 낳을 경우나 입에 맞는 음식을 별도로 시켜 먹을 경우에는 비용이 추가될 수 있어 잡비 등을 포함하면 족히 360만원(3,000달러) 정도가 된다. 산후 조리원은 5-7명이 동시에 입원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영양사와 간호사이 상주하면서 산모와 신생아를 돌봐준다.

산모들은 풀 사이즈 침대와 TV, 옷장, 욕실이 달린 방에서 머물면서 하루 세끼의 식사와 세 차례의 간식을 제공받는다. 식단은 끼니때 마다 최소 여섯 가지의 반찬으로 짜여지고 미역국도 소고기, 사골, 해물 등 세 종류 중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출산 후 산모는 유축기, 좌욕기, 자외선치료기, 다이어트 마사지기, 레이저 피부재생기로 몸 관리를 하게 된다.

병원비는 한인들이 많이 가는 굿사마리탄 병원에나 퀸 오브 엔젤스 병원의 경우 정상분만이 1박2일 기본에 140∼190만원(1,100∼1,500달러), 제왕절개의 경우 2박3일 기본에 390만원(3,000달러)이 들어가고 입원을 연장하면 하루 65만원(500달러)가 추가된다고 돼있다.

따라서 산모 초진비, 마취비, 비행기 표 값과 산전, 체제비, 신생아 초진비 등을 모두 합치면 한번 원정출산을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어느새 훌쩍 1,300만원(1만달러)을 넘어서게 된다.

12년 째 한인타운에서 개업하고 있는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출산을 전후한 시기에 산모의 심리상태가 매우 중요한데 한국서 온 산모들은 종종 '홀로 분만'에 따른 불안감과 비용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힘겹게 출산을 하는 경우가 있다"며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환자 자신의 건강상태에 따라 위험부담이 있다는 사실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릇된 부모 욕심, 현지 시선도 곱지않아

이 같이 비용도 많이 들고 정신적 부담도 있는 데 구태여 원정출산을 고집하는 데는 산모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단 미국여권과 출생증명서만 있으면 미국내 취학에 전혀 문제가 없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으며 18세 때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를 선택하면 병역도 면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땐 아이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지난 5월20일 첫 아이를 분만하고 산후조리를 하고있는 윤모(31.서울)씨는 지난 해말 LA에 다녀간 친정부모의 강력한 권유에 미국 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부모님 말씀대로 내 애가 과외열풍에 시달리며 아둥 바둥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혹 일류대를 나온다고 해도 잘산다는 보장이 없지 않는가"라며 "아이들만은 스트레스 적은 세상에 살게 하고 싶어 조금 고생이 되더라도 장기적으론 미국에 와서 애를 낳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원정 산모들은 지난 3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아들 정연씨의 원정출산 의혹이불거져 나온 것과 관련해서도 이미 특정 계층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던가, 비애국적이라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정부가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당당하게 원정출산 예찬론을 늘어놓는 산모들까지 있었다.

첫 아이를 가져 임신 32주째에 접어드는 정모(30)씨는 "서울에서는 하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조용히 왔지만 원정출산이 잘못됐다고 무조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앞으로 재정적으로만 허락이 된다면 둘째도 미국에 와서 낳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LA한인들의 시선도 그리 곱지만은 않다. 하숙집을 운영하는 정모(50)씨는 "얼마 전까지 조기 유학 온 학생들로 방들이 만원이었는데 이젠 애를 낳겠다고 미국에 오는 예비 엄마들이 줄을 늘어서고 있다.

보험도 없이 출산을 하려면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 임신한 상태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면 태아에도 좋지 않을 텐데 자식 하나 미국 시민권자를 만들면 만사형통 할 것으로 생각하나보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인가정상담소 관계자도 "원정출산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따른 것이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지만 한인들의 정서와 미국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감안할 때 지양돼야 할 현상"이라고 말했다.

체류기간 단축·입국심사도 까다로워져
   
미 연방이민국(INS)은 올해 4월에 방문, 관광 등 단기비자를 갖고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의 체류기간을 최소 1개월로 단축시키는 법안을 시행키로 시작했다. 9·11테러 이후 외국인 입국자에 대한 관리체계를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추진된 법안이다.

이 규정이 시행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방문, 관광비자를 소지하고 입국해 최고 6개월 간 미국 내 체류했던 원정 산모들은 앞으로 INS 입국 심사과정에서 1개월∼3개월 정도만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 역시 최근까지 불법체류 의사가 없는 한 임산부들에게도 다른 신청자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을 적용, 비자를 발급해 왔으나 타임지와 LA타임스 등 미국의 주요언론들이 한국의 원정출산 문제를 집중 보도함에 따라 앞으로는 심사 및 허가기준이 한층 까다로워질 전망이다.

현재 미 이민법은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불법이민을 했건 여행객이건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또 이들은 만 18세가 됐을 때 본인의 희망에 따라 미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으며 21세 때는 부모 등 외국에 있는 직계가족을 미국에 초청, 영주권을 받게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하천식 미주한국일보 사회부 차장

입력시간 2002/06/1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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