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한국무용계 남성1세대 무용가 조흥동

춤은 마음을 움직이는 '신명'

“옛날엔 저도 예쁘고 아름답게 추는 게 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무엇이 춤 같습니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요. 춤 추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녹은 희로애락이 손끝, 발끝으로 퍼져 나오는 겁니다. 꼭 빈 속에 술을 마시면 알코올 기운이 온 몸으로 번지는 순간과 비슷하지요.”

한국무용가 조흥동(61)씨는 그렇게 춤을 춘다. 1년 열 두 달 춤을 추며 산다.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풀어줬다가 감았다가, 죄었다가 늦췄다가 한다. 남자 무용수가 거의 없던 시절에 시작해, 평생을 이 한 길에 바쳤다. 3월에는 50년 춤 인생을 기념하는 감격적인 공연도 있었다. 발레, 현대 무용가들까지 찾아와 연 이틀 공연을 지켜보며 찬사를 던질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기본적으로 순수예술 관객 층 자체가 많지않은 현실에서 더구나 ‘그 춤사위가 그 춤사위 같은’ 한국무용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그의 춤을 춘다. 자신의 오장육부가 일러 주는 대로 너울대며 춤추는 춤꾼. 그 춤으로 ‘조흥동류의 독보적인 춤’이라는 극찬까지 받은 적이 있다. 쉽지 않았던 젊은 세월을 잘 견디고 난 보상이었다.

“저는 춤을 출 수도, 추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부터 집안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특히 남자가 춤을 춘다는 데 대해 이해를 못 하셨지요. 심지어 어머님은 몇 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도 끝내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신 채 떠나셨습니다. 운 좋게도 좋은 가정과 좋은 스승님들을 만났고 나름대로 어려움을 견디고 노력한 덕분에 지금 이만큼 와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설령 그렇지 못했더라도 아마 저는 지금쯤 계룡산 밑에서 박수무당이라도 되어 춤을 췄을 것 같습니다. 환경이야 어쨌든 제가 가진 신명 자체를 감출 수는 없을 테니까요. "


부농의 외아들, 춤꾼의 싹 무럭무럭

그는 경기도 이천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네 딸 뒤에 얻은 외아들로, 어려서 부터 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가족들은 그가 장래에 사업가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본인의 관심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누나만 넷이다 보니 예쁜 치마, 저고리가 주위에 널려있었다. 틈만 나면 누나들의 치마, 저고리를 꿰어 입고 머리엔 수건까지 두른 채 춤을 추곤 했다. 그러다 누나들에게 들켜 곧잘 혼이 나면서도 어린 남동생의 ‘해괴한 취미’는 도무지 멈춰지지 않았다.

온 동네에 금새 소문이 퍼졌고, 나중엔 농악대에서도 행사가 있을 때면 으레 조씨 집안 외아들을 데리러 단골로 찾아오곤 했다.

9세 때 ‘초립동’으로 공연에 참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만해도 부모님은 잠깐의 재롱 정도로만 여겼다. 놀이패와 굿 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신이 나 춤을 추는 아들을 보고도 감기만 안 걸리고 건강하면 그걸로 됐다며 귀여워했다. 설마 당신의 아들이 무용에 평생을 바치리라곤 당시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조씨의 서울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결혼한 둘째 누나 집에 함께 살면서 학교에 다녔다. 이때부터 그는 몰래 고전무용 연구소를 다니며 정식으로 전통 춤을 배웠다. 자신 외에 춤을 배우러 온 남학생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음 괴로운 짐이었다. 처음엔 함께 배우던 여학생들마저 키득거리며 그를 구경하느라 수업이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1년, 2년 차츰 시간이 지나고서야 서서히 장난기 어린 시선 대신 감탄과 부러움의 눈길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부모님께는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교습비도 학원에 다닌다는 핑계로 수강비며 용돈을 받아 충당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누나는 물론 가족 중 그 누구도 조씨의 ‘딴 짓’을 눈치채지 못했다. 1960년 대입 때 가족들은 당시 인기였던 공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뜻대로 도전했다가 낙방, 가족들의 권유대로 재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족들만 그렇게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 그는 가족들 몰래 서라벌예대 체육무용학과에 응시해 우수한 실기성적으로 합격하면서 장학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아침이면 학원에 가는 재수생처럼 집을 나와 실제로는 대학교로 향하는 조씨의 이중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나 채 1년도 되기 전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집안선 ‘정신이상자’ 취급

“여름 방학 때 친구들이 함께 농촌계몽활동을 가자며 저를 만나러 누나집에 찾아오는 바람에 모두 들통나버렸습니다. 사실을 알고 누나는 거의 기절초풍을 했지요. 곧바로 부모님이 시골에서 부랴부랴 올라오신 것을 비롯해 큰 매형, 작은 매형, 외삼촌에다가 동네 아저씨까지 총출동해 비상 가족회의가 소집됐습니다. 다들 저보고 ‘정신이상자’라고 했습니다. 남자가 춤을 춘다구요.”고집을 꺾지 않는 아들에게 결국 부모님마저 ‘네가 알아서 하라’며 마지못해 포기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셨지만, 심지어 다니던 대학의 같은 학과 친구들조차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대 밖에서의 그는 늘 고개를 수그리고 다니는 학생이었다. 캠퍼스 안을 지나노라면 등뒤에선 수시로 친구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들렸다. ‘쟤는 뭐하는 애야’ ‘춤을 추는 남학생이야’ ‘여자도 아닌 남자가 웬 춤이야’그리곤 뒤이어지는 삐딱한 웃음소리들.

그 사이에도 그는 실력 있는 대가의 이름만 들리면 불원천리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한국 무용계의 선배들 대부분이 다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열성적인 배움이 있었다. 무형문화재 강선영씨로부터 태평무를, 고 한영숙 선생으로부터는 승무 살풀이를, 이매방 선생으로부터 승무와 장검무, 김진걸 선생에게선 산조를, 임준동 선생에게선 불교의식무용을 익히는 등 이러한 배움들을 통해 탄탄한 기본을 다져나갔다.

특히 태평무에서는 조씨가 남성무용수 제 1호 이수자로 전수 받게 되면서 현재도 남성 태평무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이 뒤따르고 있다.


외국 토속춤 보며 한국춤의 가능성 발견

대학 졸업 후 1964년 중앙대에 편입, 난데없는 법학도가 되기도 했다. 단지 부모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다는, 자식으로서의 죄송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형상으론 평탄한 법학공부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춤에 못박혀 있었다.

그 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무용공부와 연습은 걸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부모님 뜻을 따라보려 했던 결심도 결국 4년 뒤 졸업과 함께 끝나버렸다. 그리곤 한 여고의 체육교사로 들어가 무용을 가르치며 약 6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 가운데 해외공연 예술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한달간의 외국공연경험은 그의 시선의 폭을 새롭게 확장시켜 놓았다. 넓디 넓은 세상, 저마다의 독특함이 아름다운 외국의 토속춤을 보면서 자신감과 한국춤의 가능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서서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였다. 귀국한 뒤 곧 사표를 내밀었다. 무용가로서 보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길을 열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평소 그를 아꼈던 학교 교장은 개인연구소를 열 수 있게까지 도와주었다. 서대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원했던 대로 마음껏 자신의 춤을 출 수 있는 삶은 좋았지만, 경제적으론 낙제였다. 학생들의 푼돈 교습비만으론 교습소 임대료도 제때 내기가 어려워 걸핏하면 몇 달씩 임대료가 밀렸다. 18년 동안 3년 간격으로 이사를 다녔다.

“그때 좌절을 많이 했습니다. 워낙 힘들다 보니 염치없이 부모님께도 다시 손을 벌려 도움을 받곤 했는데,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내가 아직도 집의 돈을 자꾸 갖다써야 하나, 제가 좋아서 추는 춤이긴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스스로 회의하면서도 차마 놓을 수는 없어 이리저리 고비를 버티다 보니 오늘까지 온 거지요.”


설움 속 땀의 대가, 여전히 치열한 삶

남자 한국무용수라는 남다른 설움 속에서도 땀의 대가는 정직했다. 1968년 첫 발표회를 가졌을 때부터 ‘무용계의 혜성’이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전통 무용계에선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고학력자란 사실만으로도 화제 거리였다.

1979년엔 한국남성무용단이란 것을 직접 창단하기도 했다. 오래도록 여성들 틈에서 여성 위주의 춤사위를 배우며 품게 된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왜 남성이 여성처럼 춤을 춰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이 남성무용단은 1981년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춤과 혼’이란 작품으로 안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2년에 입단해 12년간 머물렀던 국립무용단에선 공연 ‘맥’(1983)으로 ‘신고식’을 올리고 ‘무천의 아침’(1993)으로 절정의 마무리를 장식했다.

단원 신분이면서 직접 안무까지 맡아 군무로 선 보인 첫 작품이었던 ‘맥’은 기존의 국립무용단 스타일과는 다른 전연 획기적인 스타일이란 평가를 받았고, 연극인들로부터 ‘무용이면서 극적 요소를 지닌 독특한 작품’이란 반응을 끌어냈던 ‘무천의 아침’은 현재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화제작 중 하나다.

그후 서울예술단을 거쳐 1996년부터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맡은 데 이어 2000년부터는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도 활동, 후배 무용 들을 지도하고 있다.

국민대 겸임교수이자 한국종합예술학교에서도 강의를 맡고 있고, 와중에도 한 달에 최소한 두 세번은 외부 초청으로 직접 공연무대에 올라야하는 맹렬 현역이다.

그러면서도 공연이 있든 없든 매일 약 서너 시간은 반드시 개인 연습시간을 거르지 않는, 여전히 치열한 노장으로 살고 있다.

“체형 관리요. 특별히 하는 건 없습니다. 무용하는 사람은 그 걸음걸이만 보아도 뭔가 다를 만큼 항상 온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고 예전에 배웠고, 지금도 일상 자체가 무용 속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조절이 됩니다.” 이제는 외롭지않은 길이다. 그를 뒤이은 남성 후배와 제자들이 이미 많이 등장해있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경기 도립무용단 만해도 8명의 남자단원이 있다.

취재가 있던 날엔 더 어린 제자도 나타났다. 곧 있을 정기공연에 발탁된 7살, 10살짜리 꼬마 형제가 단원 누나, 형들의 환호에 고무된 채 종횡무진 연습장을 누비며 춤을 추었다. 50년 전 바로 자신의 모습이 조씨의 눈앞에 재연되고 있었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6/1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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