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 펀치] "엄용수 부지런, 누가 말려"

요즘처럼 우리나라 국민이 하나되는 사건이 단군 이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축구의 열기는 뜨겁다. 어떤 사람들은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벌써부터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고, 히딩크 감독을 귀화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히딩크 감독이 계약 기간이 끝나 돌아간다면 아마 전국민이 인천 국제공항으로 몰려가 육탄저지를 벌일 움직임도 보인다. 항간에서는 히딩크의 연봉을 엄청나게 올려주고 그를 붙잡기 위해 전국민이 1,000원씩 성금을 모으는 100만인 서명운동이라도 벌이자고 들썩인다.

왜 이렇게 축구에, 히딩크에 우리 국민은 자발적인 열성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축구선수들이 보여준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모습 때문일 것이다.

느슨하던 선수들이 히딩크의 조련 아래 새로 태어난 개조인간들처럼 전후반 90분과 연장전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그 넓은 그라운드를 뛰는 모습에 어느 국민이 열광하지않을 수 있을까.

본인들보다 더 큰 체격을 지닌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부딪쳐 나가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뛰고,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헉헉대는 숨소리마저 손에 잡을 수 있을 듯이 선명한데도 선수들은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뛴다.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면서도 너무 열심히 뛰어 다니는 선수들이 안쓰러워 연장전까지 치르게 하는 게 차라리 미안하고 서글플 정도였다. 지더라도 괜찮아, 너희들은 할만큼 했어, 이제 조금 쉬어, 하는 안타까움이 피붙이들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짠하다.

저절로 눈물이 나올만큼, 처절할 정도로 몰두하며 뛰어 다니는 선수들을 보면서 인간이 인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얼마나 숙연한 일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연예인 중에서 부지런하기로 따지면 개그맨 엄용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언젠가 한번 엄용수의 한달치 스케줄 표를 본 적이 있었다.

하루도 빈자리가 없을만큼 빽빽이 들어찬 칸마다 하루에 보통 2,3건의 행사가 있었고 지역도 광주, 부산을 가리지않는 전국을 망라하고 있었다. 지방을 다니는 비행기 시간이 빼곡이 적힌 그의 스케쥴표를 보면서 잠시 아연할 정도였다.

엄용수가 집들이를 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개그맨들이 그의 집에 모여 놀면서 심심풀이로 포카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 12시쯤 되자 엄용수가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이다.

"나 잠깐 일좀 갔다 올게. 펑크내면 안되거든. 금방 올거니까 놀고 있어."

그러고 나가더니 두시간 후쯤 돌아왔다. 알고 보니 밤업소 3군데를 가뿐하게(?) 뛰고 온 것이었다. 그의 스케쥴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개그맨들은 '야, 집들이에 주인이 빠지냐' '이젠 가지마' '오늘 일은 다 끝낸거지?' 라며 다짐을 받았다. 엄용수 역시 '그래, 안갈게, 패 돌려' 라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새벽 4시쯤 됐는데 엄용수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

마치 담배 한갑 사러 나간 사람처럼 나간 엄용수는 6시가 넘도록 돌아오지를 않았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놀던 사람들이 지치기도 하고 슬슬 눈치도 보여서 엄용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소식이 없는 거였다.

"무슨 집들이가 이러냐. 도대체 어디 간거야?"

"야, 심심한데 TV나 켜봐. "

누군가 TV를 켰고 별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화면에 잡힌 한 인물 때문에 모두들 기절하는줄 알았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관령 정상입니다…"

조금전까지 같이 앉아 놀던 엄용수가 그 새벽에, 그것도 대관령에서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동네 한바퀴 돌고 올 것처럼 하고 나가더니 대관령에서 마이크를 잡고 단정하게 인사를 하는 엄용수를 TV 화면에서 보면서 그날 모인 집들이 손님들은 경악을 넘어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우리 축구선수들이나 엄용수처럼 부지런히,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 다니는 근성이 월드컵 이후 우리 경제를 살리는 탄탄한 기본임을 깨닫는 오늘이다.

입력시간 2002/06/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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