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특집] 히딩크, 전설을 쓰다

모두에게 감동과 환희를…대통령보다 더 큰 이 시대의 영웅

6월 25일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준결승전이 벌어진 서울 상암 월드컵 축구 경기장.

‘붉은 바다’를 이룬 출렁이는 응원단 사이로 네덜란드 특유의 오렌지색 플랫카드가 한 눈에 들어왔다. ‘Hiddink for Korean President?-Ageintje (히딩크를 한국 대통령으로?-농담)’

한국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축구 반세기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월드컵이 시작되는 6월부터 “한국 축구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한국이 월드컵 D조 리그 전을 무패로 치달으며 파란과 이변을 연출하자 정ㆍ재계에서는 ‘히딩크 식 리더십’ 과 ‘히딩크 식 경영’등 그의 축구철학을 바탕으로 한 신조어가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고 ‘히딩크 신드롬’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급속히 확산됐다.

한국 축구의 신화를 창조한 그를 위한 전국적인 각종 사업들도 줄을 이었다. 무료 항공권 제공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 동상 건립까지 ‘히딩크 열풍’은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히딩크 감독의 자취를 한국 땅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 제주도 남제주군은 히딩크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나섰다.

350년 전 제주도 해안에 표착했던 네덜란드인 하멜 기념사업과 병행할 이 사업은 국적이 같은 두 사람이 한국을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렸다는 점에 착안했다. 또 서귀포시 예례동에 조성되는 휴양지에는 ‘히딩크 하우스’가 건립될 계획이다.

국토 최 남단인 전남 해남군 송지면 땅끝 전망대에는 히딩크 감독의 발 도장과 어록이 새겨진다. 태극전사 23명의 발 도장과 함게 새겨질 ‘월드컵 영웅 판’은 땅끝 전망대 8~9층 사이 계단 벽에 부착돼 역사로 보존된다.

또 박광태 광주시장 당선자는 7월1일 취임 즉시, 히딩크 감독을 비롯한 태극 전사들에게 광주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스페인 8강전 때 대표팀이 머물렀던 광주시 동구 불로동 ‘프리마 콘티넨탈 호텔’은 호텔이름을 아예 ‘히딩크 콘티넨탈 호텔’로 바꾸기로 했다. 부산 해운대 그랜드 호텔도 호텔객실 2002호를 ‘거스 히딩크 룸’으로 만들 계획이다.

대한항공은 국제선 전노선 1등 석을 2006년 독일월드컵 때까지 무료 제공키로 했다. 또 교보생명은 보험금 10억원 상당의 종신 보험을 들어주기로 했다. 골프채를 수입하는 한 회사는 골프마니아인 그에게 평생 골프채를 무료로 제공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신드롬 담담하게 바라보는 현실주의자

한국 전역 사회 곳곳에서 뜨겁게 일고있는 ‘히딩크 신드롬’. 이를 정작 바라보는 거스 히딩크 감독 본인의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

포르투갈을 누르고 한국이 역사상 처음 월드컵 16강에 오른 순간, 히딩크 감독은 흥분해 붉어진 얼굴과 열정어린 표정과는 달리 눈빛에는 냉정하리 만큼 승부사의 기질이 넘쳐 흘렀다.

그는 승리의 첫 소감으로 “오늘의 성과는 나의 지도방식에 열심히 따라준 선수들의 몫”이라고 승리의 모든 영광을 우선 선수들에게 돌리는 겸양지덕의 자세를 보였다. 그는 네덜란드 최대부수를 자랑하는 데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먼저 ‘보수주의자’라고 강조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히딩크 신드롬’에 대해 “기업들의 각종 세미나 참석 요청 등 각계 각층에서 많은 제안들이 쇄도하고 나를 치켜세우고 있지만 나는 현재 대표팀의 ‘작은 독재자’로 만족한다”며 외풍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반응이었다.

그는 또 ‘잇따른 승리로 한 국민들의 높아진 기대감과 희망을 앞으로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특유의 장난끼 어린 미소를 얼굴 가득히 지어보이며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나 역시 혼란스럽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현실성이 없는 주변의 막연한 기대감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화려한 승리의 퍼레이드가 한 차례 지나간 후 거리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내 뒹구는 휴지 조각의 흩어짐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팀이 승승장구하며 국민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일 때 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두에 항상 “ ‘현실성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다음 게임을 치를 계획”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치밀한 이미지 관리가 지도력 극대화

히딩크는 대화를 즐긴다. 한 마디 질문에도 다섯 마디 이상의 답변을 늘어놓으며 인터뷰를 즐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지루하지 않다.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절묘한 비유를 섞어 말을 이어가기 때문에 듣는 이로 하여금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경기장에서도 심판에게 거센 항의를 하지만, 귀엽게(?) ‘오버’할 줄 아는 제스처일 뿐 그의 쇼맨십은 경지에 달해있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천성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미지 관리’라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지도자는 부하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고 강력한 지도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그가 나온 한 광고의 카피 내용처럼 전지전능한 신화적 영웅이 아니다. 보수ㆍ현실주의자인 그는 스스로 신화 속의 영웅임을 거부한다.

그러나 히딩크 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모두에게 짜릿한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는 사람은 대통령 보다 더 큰 이 시대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2002/06/29 17:44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