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특집] 눈물에서 건진 대한민국의 아들들

웨이터 김남일·이을용, 셔츠공장 직공 설기현…
혹독한 훈련·가난으로 가출·방황

진흙 속에서 피어 오른 연꽃이 더욱 아름답다. 태극 전사들의 승리가 그렇다. 가난과 곤경을 딛고 선 그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일궈낸 쾌거는 우리 시대의 값진 교훈이다.


김남일ㆍ이을용 도망가서 웨이터 생활

히딩크가 “나 자신도 놀랄 정도의 성숙한 기교의 선수”로 극찬하는 김남일(25ㆍ전남 드래곤즈)에게는 남다른 성장기가 있다. 그는 몸담고 있던 부평고 축구부에 전통처럼 굳어져 온 구타에 반발해 팀을 무단 이탈해 8개월 동안 웨이터 생활을 했다.

팀을 뛰쳐나온뒤 집에도 들어 오지 않던 아들의 거처를 수소문해 가던 아버지(김재기)가 그를 찾은 곳은 부평역 앞 나이트 클럽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집에 와서 “마음을 잡아달라”며 가족들 앞에서 흘렸던 눈물이 김남일이 태극전사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을용(27ㆍ부천 SK)은 잡초처럼 살았다. 강원도 산골 출신으로 축구에만 매달리던 그는 ‘실력외적 요인’으로 명문대 진학과 청소년 대표팀에서 탈락하면서 심각한 방황을 겪었다. 제천의 나이트 클럽 웨이터로 있던 그를 건져 올린 은인은 1995년 한국철도 이현창 감독이었다.

전지 훈련차 강릉에 갔다 소식을 들은 이 감독은 고교 시절 눈여겨 봐둔 이을용이 있던 제천까지 찾아 가 설득을 거듭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한국철도 소속 선수로 복귀한 이을용은 1997년 프로축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부천의 지명을 받았다.

악바리 이천수(21ㆍ울산 현대)에게 최대의 적은 가난이었다. 중학 입학 무렵 아버지(이준만) 회사가 부도나자 노조위원장이었던 부친은 동료들의 체불 임금을 챙겨주는 일에 손발이 묶인 것이다. 축구부 합숙비마저 제때 내지 못 하던 이천수는 더욱 축구에 매달렸다. 공을 차는 동안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편모슬하ㆍ가난고통 볼차며 잊어

꽃미남 안정환(26ㆍ이탈리아 페루자) 역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편모슬하에서 서울의 돈암동 흑석동 신길동, 부천, 수원 등으로 자주 이사를 해야 했던 그에게 공차기란 친구 없는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깜찍하게 볼을 다루던 그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동네 조기 축구회였다. 아저씨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던 그는 축구회 마스코트로 귀여움을 받다가 대림초등 축구부로 축구에 정식으로 입문했으며 1999년에는 프로축구 최고의 영예인 MVP까지 올랐다.

아버지 없이 자란 태극전사의 활약에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이 숨어 있다.

설기현(23ㆍ벨기에 안더레흐트)은 여덟살 나던 1987년 아버지를 탄광 사고로 잃었다. 청상 과부가 된 어머니(김영자)와 형을 도와 어릴 적부터 집안 일을 해야 했고 두 동생을 돌봐야 했다.

어머니 김씨는 “나이 30에 혼자가 돼 과일 장사 등으로 4형제를 키우느라 기현이 운동 뒷바라지가 부족했던 게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실제로 설기현은 고교시절 체벌과 혹독한 훈련에 지쳐 친구들과 함께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새벽 청량리 역에 내려 우동 한 그릇씩 먹고 나니 돌아 갈 차비가 없었다. 간신히 면목동 부근의 셔츠 공장에 일자리를 얻고 보니 하루 종일 셔츠를 뒤집는 게 다였다.

당시 2주만에 끝난 가출극은 그에게 ‘내겐 오직 축구뿐’이라는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 준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들과 싸우는 것이 축구부 코치의 눈에 띄어 그 벌칙으로 엉겁결에 시작한 축구에의 열정은 가출이란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커갔다.


싸움꾼 송종국, 이운재는 ‘그늘에 볕’

히딩크의 절대적 신뢰를 받는 송종국(23ㆍ부산 아이콘스)은 어린 시절 못 말리는 싸움닭이었다. 2남 1녀의 막내인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다섯 식구가 단간방에서 함께 살아야 했을 정도의 가난 탓에 축구조차 계속할 수 없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축구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 봐 온 배재중 백현영 감독의 배려 덕이었다.

힘든 집안 형편 때문에 외골수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소문난 싸움꾼이었다. 또래는 물론 훨씬 덩치가 큰 동네형들에게도 지지 않고 맞서는 악바리였다. 그러나 이런 성격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변해갔다.

대학 시절의 그는 미팅 자리에서 파트너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붙였을 정도였다. 소속팀에서 ‘썰렁 왕자’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종종 동료들에게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뛰어야 한다”며 다짐하는 것도 비슷한 까닭이다.

포르투갈전 등 유럽팀과의 일전에서 통쾌한 골을 선보였던 ‘유럽 킬러’ 박지성(21ㆍ교토 퍼플상가)의 발은 축구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평발이다. 대표팀에서 가장 체력이 뛰어난 선수이자 가장 많이 뛰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는 박지성이 평발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무릎에 까닭모를 통증을 느낀 그가 평소보다 정밀한 진찰을 원했다. 선수촌 외부의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평발이니 지나친 플레이는 삼가라”는 진단을 내렸다.

당시 의사는 그가 축구 선수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이 사실은 동행한 대표팀 관계자를 통해 알려져 연습 때면 항상 앞장 서 온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에 진가를 톡톡히 발휘한 ‘거미손’ 이운재(29ㆍ상무)는 김병지의 그늘에 가려 벤치신세를 면치 못하던 만년 2인자였다.

그의 판단력과 신중함을 높이 산 히딩크의 신임을 받아 월드컵 경기에 전격 발탁돼 8강까지의 5개 경기에서 단 2점만 실점하고, 스페인전에선 눈부신 선전을 펼쳐 국민적인 영웅이 됐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06/2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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