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를 벤치마킹하자] 책임질 줄 아는 정치, 정치인

근면·개척·신뢰정신 바탕의 실리적 국가경영, 잠재 경쟁력 세계3위 원동력

거스 히딩크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가운데 히딩크 감독의 조국인 네덜란드도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비록 국토는 좁고 자원은 별로 없으나 ‘강소국(强小國)’으로써 정치와 경제는 물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최일류국으로 발전해왔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업그레이드 시켰듯이 한국도 네덜란드를 벤치 마킹해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국과 네덜란드와의 그 동안 별로 인연이 없었으나 히딩크 감독 신드롬까지 나오고 있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각 분야에서 협력을 증진, 한국이 네덜란드의 장점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하멜이 맺은 인연 히딩크가 꽃 피워

네덜란드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하멜이다. 조선의 존재를 기록을 통해 서양에 알린 네덜란드 선원 하멜은 1653년(효종 4년)일행 36명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는 서울로 압송돼 훈련도감에 편입된 뒤 강진의 전라병영과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돼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 일행 7명과 함께 탈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그는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인 ‘하멜 표류기’를 썼으며 이 책은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었다. 조선을 서양에 데뷔시킨 홍보 대사역을 수행한 셈이다.

하멜이 표류해왔을 때 통역자로 2년간 같이 지내며 그에게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쳐준 사람은 박연(朴淵)이었다. 역시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하멜보다 앞서 1628년에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에 표류했다가 귀화해 조선 여자와 결혼, 남매를 두면서 완전히 이 땅에 정착했다.

박연의 네덜란드 이름은 벨테브레였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한 박연은 병자호란 때 출전하는가 하면 명에서 밀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작법을 가르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효종은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장수 이완에게 실무책임을 맡겼고, 박연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했다.

이처럼 옛 인연을 더듬지 않았더라도 히딩크 감독의 활약으로 대륙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과 네덜란드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풍차와 꽃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아닌 이웃과 같은 친밀감이 싹트고 있다.

때문에 히딩크 감독에대해 법무부는 명예국민증 수여를, 광주시는 ‘히딩크로’를 만드는 방안을 고려중이라고 한다. 하멜이 표류해 도착한 남제주 용머리 관광지구에 동상을 건립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일부에서는 박연처럼 아예 귀화시켜 한국 사람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하고 있다.


거지들도 영어ㆍ독일어 유창한 나라

그러면 히딩크 감독의 조국 네덜란드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네덜란드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은 ‘더치 페이’다. ‘더치 트리트’라고도 사용되는 이 말은 ‘각자 부담’이라는 뜻이다.

식당에서 식사 후 밥값을 서로 각자가 부담하자는 데 사용되는 이 말을 우리 정서에 안 맞기는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의 사고를 읽는데 가장 적당한 말일 것이다. 즉 자기가 먹은 만큼 돈을 낸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책임진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나라가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4분의 1이 바다보다 낮은 작은 나라이지만 강하고 풍요로운 나라다. 국가 잠재 경쟁력에서도 미국 싱가포르 다음이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네덜란드는 17세기 태국과 일본까지 무역선을 보냈고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기도 했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세계는 신이 만들고 네덜란드는 우리가 만들었다”는 말처럼 네덜란드인들은 근면과 개척정신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운다. 네덜란드의 국가 경영의 특징을 보면 첫째 실리추구이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침략과 지배의 역사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지만 감정은 깊숙이 감추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네덜란드에게 독일은 가장 큰 시장이다.

네덜란드의 하이네켄은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로 자리 잡았고 치즈 등 낙농제품과 채소, 꽃 등 농산품도 독일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둘째,네덜란드는 다국적기업의 본부가 가장 많이 있는 나라다. 거지도 영어와 독일어를 잘한다.

외국기업 입주를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을 만들어 외국자본을 유치하고 있다. 다민족과 다언어를 사용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포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화의 첨병이라고 말할 수있다, 때문에 세계의 모든 공장이 자국의 공장이고 모든 나라가 자국의 시장이다.셋째는 신뢰와 투명성이다. 네덜란드에서 기차나 전철은 요금을 스스로 내고 탄다. 검사래야 검표원이 가끔 무작위로 승객의 표 소지여부를 확인할 뿐이다.

네덜란드는 1982년 국가개혁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 냈다. 노조는 임금 9% 삭감에, 사용자는 복지제도의 골격유지와 고용확대에, 정부는 행정규제 축소에 동의했다. 상호 신뢰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고통의 분담’이다. 투명성 역시 뛰어나다.

정부의 정책을 모두 공개하며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과 법안이 마련돼도 국민들은 놀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녀들은 어머니 성을 따른다. 이혼이 늘어가는 추세에 맞춰 자녀의 성이 자주 바뀌지 않도록 배려한 입법이다.

동성연애만이 아니라 동성간의 결혼도 법제화했다. 최근엔 안락사도 허용한 첫 번째 나라가 되었다. 더 놀랍고 파격적인 것은 마약판매 허용이다. 마약판매가 그늘에서 이뤄져 범죄의 온상이 되게 하는 것보다 허용해 마약 중독자들의 범법을 막는 게 낫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모범 보이는 정치인

정치인들도 국민에게 모범을 보인다. 1994년 8월 총선거에서 승리, 18년의 기민당 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집권한 빔 코크(65) 총리는 7년간 3당 연립정권의 이해를 잘 조정해 ‘타협의 예술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차기 선거에서도 당선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데도 과감하게 정치에서 은퇴했다. 기민당 조차“여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의 총리가 되려고 진정으로 노력하는 지도자”로 칭송할 정도다. 노동당(PVDA) 출신의 코크 총리가 처리한 가장 최대의 성과는 노사분규의 적절한 해결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노사가 집단협상에 의해 임금협약을 맺고 있다.

네덜란드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노사의 합의에 의한 임금의 자율적인 통제인데, 코크 총리는 노조측과 힘겨운 협상을 벌이게 됐다. 코크 총리는 아이러니컬하게 협상 상대인 네덜란드 노조 연맹(FNV)에서 잔뼈가 굵은 노조지도자 출신이었다.

그는 비즈니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서 잠시 일한 뒤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까지 노조활동을 통해 사회경험을 쌓아 왔다. 1961년 네덜란드 노조건설연합의 국제담당 차장으로 노조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65년과 1967년 이 노조의 경제담당 부장과 서기직에 올랐다.

이후 1969년과 1972년 네덜란드 노조연맹(FNN)의 서기와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1973년부터 85년까지 FNN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FNN이 네덜란드 가톨릭 노조연맹과 합병, 네덜란드 노조연맹(FNV)이 된 이후에도 다시 위원장을 맡았고, 유럽노조연합의 위원장직도 역임했다.

1986년 총선에서 노동당 대표로 의원직에 당선된 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부총리겸 재무장관을 지냈다. 1982년 바세나르 노사 협약 당시 노조측 대표였던 코크는 노사양측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선에 고용조건과 근로환경 등을 협의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보장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설득해 협상에 성공했다.

코크 총리는 4월 16일 보스니아 내전 당시 대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론을 들며 전격적으로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문제가 된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이 지역에서 민간인 7,500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 네덜란드 전쟁기록연구소(NIOD)는 유엔과 네덜란드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평화유지군 임무를 맡았던 네덜란드가 위험한 지역이라는 수 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병력 110명만을 파견해 비극을 방조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코크 총리는 비상내각에서 “국제 사회는 실체가 없으며 그래서 책임도 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질 것이다”이라며 사퇴했다. 지난해 8월 3선 연임이 거의 확실한 상태에서 후진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 ‘떠날 때를 아는 정치인’이란 찬사를 들었던 그는 이번 사퇴로 ‘책임질 줄 아는 정치인’이란 이미지까지 얻게 됐다.

네덜란드의 우파인 기독교민주당(CDA)과 극우파 정당인 ‘핌 포르트와인 리스트’(LPF)는 5월 15일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PVDA)에 압승을 거뒀다. CDA는 전체 150개 의회 의석 중 43석을 차지, 제1당의 자리에 올랐다.

45석으로 집권당의 자리를 지켰던 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23석에 그쳐 참패를 당했고, 연정 파트너였던 우파의 자유민주당(VVD)도 38석에서 23석으로 줄어들었다. 철학교수 출신인 얀 페터 발케넨데(46) CDA 당수가 총리로 취임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06/30 13:52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