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젠 발렌타인 기자가 말한 '인간 히딩크'

[네덜란드를 벤치마킹하자] 모험가적 기질이 한국돌풍 일궈내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영웅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월드컵 개막 직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고 결국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쓴 거스 히딩크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 감독도 예외는 아니다.

축구 감독 히딩크에 대해서는 그의 멋진 골 세리머니 장면 만큼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간 히딩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선수와 코치 생활을 할 때부터 축구와 사생활을 철저히 분리시켜온 것도 한 이유다.

그의 가족은 물론 아내의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가족들과 여자 친구 엘리자베스 만이 ‘인간 히딩크’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축구장 밖에서 만나는 히딩크 감독은 인간적인 모습이 넘쳐 난다. 다정다감한 성격의 그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또 기자들에게 항상 훈련캠프를 개방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다.


가족ㆍ아내 철저한 베일에, 특권의식 없어

히딩크는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 감독시절, 팀 내 노장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냈다. 덴마크의 소렌 러비와 네덜란드 출신의 빔 키프트는 히딩크 감독과 호텔 로비에서 밤늦게까지 살아가는 재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집을 떠나 잠 못 드는 선수들을 굳이 숙소로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일단 선수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경기력에도 도움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시작을 앞두고 대전에서도 한국팀 스태프와 선수들의 가족들은 자유롭게 찾아올 수 있었다.

그는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태프와 선수들에게 훈련이나 경기에서 철저히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지만 언제나 선수 개개인에게 성격이나 특성을 발휘할 여지를 남겨 준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지도 방식을 악용하려는 선수들을 곧장 팀에서 방출함으로써 팀 내 질서를 유지했다.

히딩크 감독은 모험가적인 성향이 많다. 오토바이를 타고 산에 오르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일단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즐긴다. 그는 삶과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는 간혹 쾌락주의자로 묘사될 때가 있는데 순전히 긍정적 의미일 때만 맞는 말이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자도 아니다. 비싼 시가 대신 노동자들처럼 직접 말아 피우는 소박한 담배를 즐긴다. 그는 고가의 옷이나 멋진 스포츠카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개인 운전사 김 모씨를 고용한 것도 특권 의식 보다는 한국에서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휴식을 취하며 복잡한 머리 속을 정리하고 싶을 때 골프를 친다. 소문난 골프 광이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았을 당시 호사가들은 그가 대표팀보다 골프 핸디캡에 더 신경을 쓴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1998 프랑스 월드컵서 네덜란드 대표팀을 4강에 진출 시킴으로써 이 같은 비난을 일축했다.

그것도 아무 사고 없이 말이다. 네덜란드팀은 원정경기의 경우 5일만 지나면 꼭 불미스러운 사고를 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지도력은 한층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선수 개개인 존중, 열린 마음으로 팀 운용

히딩크 감독은 심리학을 응용해 팀 관리를 한다. 이것이 그의 주요한 성공 요인 중 하나다. 히딩크 감독은 스타급 선수 개개인의 역량을 존중한다. 하지만 조직력과 팀 플레이에 위기가 닥친다면 개인보다는 팀워크에 중점을 둔다.

팀 내에서의 평등과 공정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또 대학에서 공부한 체육 교육학적 이론도 팀 지도에 응용한다.

히딩크 감독은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듣거나 알려 하는 것이 쓸데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같은 명문 클럽을 지휘할 때 그는 각 나라에서 영웅으로 추앙 받는 최고 스타급 선수들을 다뤄야 했다.

히딩크 감독은 이러한 선수들의 비위를 맞추고 편의를 봐주기 보다 때로는 동등하게, 더 거리낌 없이 그들을 지휘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이 때때로 팀보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 분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얼마 전 한국팀에서 이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팀의 조직력을 해치는 선수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는 특혜를 준다. 그는 최고 선수들을 잘 다루면서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선수들을 자극, 시너지 효과를 거둔다. 아인트호벤 감독 시절, 그는 최고의 말썽꾼으로 알려진 브라질의 호마리우 선수를 길들여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히딩크 감독이 발렌시아로 자리를 옮겨 아인트호벤과 평가전을 치를 때 호마리우가 히딩크 감독을 만나자 마자 울음을 터뜨린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이탈리아전이 끝난 후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과 호마리우를 비교했다. 축구 기술 측면에서 아닌 다루기 어렵지만 제대로 길들이면 결정적인 순간, 한 건을 올릴 재능을 갖춘 선수라는 점을 지적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선수들을 존중한다. 이것을 잘 아는 선수들은 히딩크 감독에게 실전에서의 승리로 보답한다. 일단 그의 마음에 든 선수에 대해서는 끝까지 애정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시절 히딩크 감독은 은퇴한 선수들을 위한 특별 감독 훈련 코스를 만들어줄 것을 축구협회에 요청했다. 1년 후 호날드 코맨 등 4명의 코치들이 배출됐다. 히딩크 감독은 1998 프랑스 월드컵 때 이들을 코치를 기용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와 감독, 기자, 해설가 등 모든 사람들의 시점에서 경기를 분석하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는 데 활용한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팀을 맡은 후 전력을 공개하는 것이 실력 향상을 더 빠르게 한다고 판단했다.

기술 면에서는 네덜란드 스타일을 택했다. 공격 면에서는 위협적인 파괴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결국 한국은 프랑스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뛰어난 기술과 경험을 갖춘 팀들 조차 두려워할 만한 수준의 공격력으로 무장했다.

월드컵서 한국팀의 돌풍은 우연히 혹은 나쁜 심판에 의해 부정한 방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네딘 지단이 한국과의 평가전서 부상, 프랑스호의 침몰을 가져온 것도 한국 축구의 가공할 만한 실력 향상 때문이다.


히딩크 맡은 한국, 선수들 믿은 히딩크

히딩크 감독이 한국팀과 계약했을 때 네덜란드 기자들은 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돈 때문에 한국에 간다고 생각했다. 1998 월드컵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5대0으로 완패했던 사실만 떠올렸기 때문이다.

감독 부임 직후 한 네덜란드 기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히딩크 감독은 갈 길은 멀지만 목표를 향한 준비 과정과 한국팀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평가전의 성적부진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이에 굽히지 않고 자신의 계획 대로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국이 그만큼 그를 믿고 밀어줬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아마 히딩크 감독이 이 만큼 뜻을 펼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 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온 국민들은 히딩크 감독과 한국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그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을 때 보다 훨씬 더 큰 명성과 존경을 얻었다. 최고 스타 선수들로 구성된 네덜란드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우승 트로피를 안아야 겨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의 무명인 한국 선수들을 이끌고 4강까지 올라간 것은 정말로 엄청난 성적이라는 평가다. 네덜란드의 4강 진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결과다.

전통적으로 한국 축구의 강점으로 꼽혀 온 스피드와 투지 외에도 선수들은 훨씬 더 많은 장점을 갖췄다. 박지성은 유럽리그 등 그가 원하는 어떤 팀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을 갖춘 좋은 선수다.


차기 월드컵에서 조국팀 지휘할 것

네덜란드에서 히딩크 감독은 자신을 애써 드러내거나 과시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것과 아는 것을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높이 살 만 하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이후 아인트호벤으로 돌아올 것이 확실하다. 아인트호벤과 히딩크 감독이 서로를 원하고 있으며 해리 반 라이지 구단주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서 애초 설정했던 목표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뤄냈다.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또다시 역량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심판들의 부정 등 의외의 요소가 개입해 일본에 패할 경우 결국 월드컵에서의 성과는 물거품이 돼버릴 우려가 있다. 히딩크 감독이 이미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인 점을 감안하면 2006 독일월드컵 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아인트호벤과의 계약은 아마 2년 정도면 끝나겠지만 다음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팀을 지휘할 것이다. 그가 월드컵 무대서 조국의 팀과 한 번 더 일해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드리젠 발렌타인(39)

유럽 최대 신문 중 하나로 80만 부수를 자랑하는 네덜란드 일간 ‘데 텔레그라프’ 축구전문기자. 히딩크 감독 전담으로 월드컵 3회 취재 경력. 1988년 히딩크가 아인트호벤 사령탑일 때부터 그와 친분을 맺어왔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06/30 14:13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