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제대로 한번 미쳐보자


거리 응원의 열기가 참으로 대단하다. 미국전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 포르투갈전에선 그 보다 휠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월드컵 이전에도 국가대표 경기가 있을 때 붉은 악마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전광판 응원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민이 모여서 대규모의 거리 응원을 펼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말하건대, 21세기를 기념하는 최대의 퍼포먼스라 할 만한 문화적인 사건이다.

실 조금만 냉정하게 보면, 거리 응원에는 의아한 측면도 없지는 않다. 운동장에서 직접 관전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중계방송을 보는 것일 따름인데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열광하는 것일까.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70·80년대의 정치적 열정이 90년대 이후 인터넷을 통해서 형성된 수평적 인간관계와 매개되면서 문화적 축제의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국가로 대변되는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해 동원된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열정에 바탕을 둔 새로운 집단주의 또는 열린 민족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민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광장'에 대한 그리움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거리란 그리고 광장이란 무엇이었던가. 도로(道路)에 대한 근대적인 관념이 도입된 것은 100년 전쯤의 일이다.

독립신문(1896.5.9)의 기사를 보면, 길이란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전국 인민의 것이니 인민의 땅(도로) 위에다 무리하게 집을 짓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공간적 배치를 통해서 국왕의 권위가 관철되었던 서울의 중심가를 제외하면 거리와 도로에 대한 공사(公私)의 구분이 애매했던 것이다.

만민공동회(1896)나 3·1운동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서 거리가 정치적 광장의 모습으로 다가온 적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한국인에게는 광장으로서의 거리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1961년에 출간된 최인훈의 광장은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4·19는 거리에서 광장을 발견했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하지만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광장은 국가가 지정한 장소(5·16 광장)로 제한되고 대중동원과 퍼레이드 문화가 주도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1970-80년대의 거리는 해방의 이념과 억압적인 권력이 충돌하는 격정적인 정치적 광장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면 광장으로서의 거리는 일시적으로 모습을 감춘다. 광장의 이미지를 상실한 거리는 지역적·계층적·문화적 차이에 따라 특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압구정동의 로데오 거리나 홍대 앞의 피카소 거리처럼 새로운 문화적 기호(記號)들이 악보화된 유행처럼 흘러가는 공간으로 재규정된다.

또한 자폐적인 성격의 '방' 문화(노래방·비디오방 등)나 저항적인 언더그라운드 문화(클럽)가 광장을 대체하는 '밀실'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 외형상으로나마 광장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축제 때의 대학 캠퍼스 정도였다.

그리고 2002년 6월, 우리는 거리의 새로운 성격과 만나게 된다. 거리는 한국민이 창출해 낸 최초의 대중적인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거리 응원은 부정과 부패 그리고 무능력으로 점철된 국가 이미지로부터 국민들이 받아왔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국민들 스스로가 마련한 문화적 카니발이다.

따라서 권위적 억압기구의 전유물이었던 국가 표상(태극기·애국가)이 거리 응원을 통해서 국민의 손으로 이월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참으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목이 쉬어가며 '대∼한민국'을 외치던 거리 응원단이 국가대표선수들의 모습에서 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월드컵 16강은 하나의 가시적인 상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준비했고 최선을 다해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자랑스런 우리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넘겨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깨끗하고 정정당당하며 성실하게 준비하는 국가의 이미지. 그런 의미에서 거리 응원은 정치적 자존심의 문화적 발현이다.

축제가 끝나면 우리는 많이 허탈해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탈해질 것을 걱정해서 미쳐야 할 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월드컵을 통해서 열정이 살아 숨쉬는 축제의 공간을 만들어 낸 한국민들이 자랑스럽다. 제대로 한번 미쳐보자.

김동식 문학평론가

입력시간 2002/06/3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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