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중인 한국 최고의 소울가수 박인수

"내 인생의 의미는 노래..."

한국 최고의 소울 가수 박인수(55)가 병마와 싸우며 재기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음악 이야기를 하면 신이나. 음악은 내 인생의 전부야. 그 이상 아름다운 것은 없어요. 다시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췌장에 생긴 큰 종양 때문에 ‘저혈당’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을 헤매던 박인수.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췌장에 종양, 후배 이경우 도움으로 회생

박인수는 6월 중순 췌장 종양제거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현재 백 병원에서 퇴원할 날만을 손꼽고 있다.

오랜 투병으로 허약해진 그가 8시간이나 걸린 대수술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음악과 후배가수 이경우, 버려진 노인과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산 행복의 집 정봉인 목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잊혀지고 내버려진 박인수에게 두 사람은 수호 천사였다. 박인수는 “내 멋대로 살아온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제 남을 위해 희생하며 남은 여생을 살겠다”며 병상에서 울먹였다. 몇 년 전부터 가요계에는 ‘가수 박인수가 객사했다’는 괴담이 떠다녔다.

사실 박인수는 최고의 소울 가수라는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가요계의 기피 인물이었다. 동시대 가수들도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조차 싫어할 정도였다. 특히 그의 기행 때문에 재즈 드러머 김대환이 시신을 수습해 장례까지 치렀다는 구체적인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5월 중순, 모 일간지의 사회면에 ‘가수 박인수 쓸쓸한 투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가요계가 발칵 뒤집혔다.

대중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 가수의 처참한 현주소에 놀랐으며 가요 관계자들은 그의 생존소식에 경악했다. 누구보다 먼저 병실로 달려온 후배가 이경우였다. 그는 몰라보게 초췌해진 선배 박인수의 손을 부여잡고 한동안 오열했다.


가요계 왕따로 전락, 떠돌이 생활

두 사람의 인연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말 ‘목화밭’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남성 듀오 ‘하사와 병장’의 리더 이경우에게 1960년대 중반부터 흑인 특유의 소울 곡들을 자유자재로 소화해냈던 박인수는 음악 영웅이었다.

듀오 해체 이후 재즈가수로 독립한 이경우는 한영애와 더불어 1989년 독집 ‘블루스맨’ 음반으로 가요계에 소울 블루스 열풍을 몰고 오며 주목 받았다. KBS 2TV ‘연예가 중계’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담당 PD 박성주는 ‘원조 격인 선배가수가 없냐’고 물어오자 이경우는 까까머리 속초고교 시절에 우상으로 숭배했던 박인수가 떠올랐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노래하던 박인수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 함께 출연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됐다.

이때가 1989년 여름이었다. 이경우는 “처음 만나보니 돈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박인수 돕기 운동’의 중심에서 땀을 흘리는 그로서도 박인수는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좋게 말하지만 그는 사실 최대 피해자였다. 방송출연 후 기행을 일삼던 박인수는 출연업소에서 해고당했다. 노래 외에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던 그는 일을 찾기보다는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시작했다.

이경우는 새벽 1~2시에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선배가 안스러워 여관에서 재우고 용돈도 주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희망 없는 관계가 답답하고 싫었다. 1994년 어느 날 MBC TV ‘주부가요열창’에 조영남과 함께 나간다며 박인수가 찾아왔다.

기쁜 마음으로 만나 목욕비를 쥐어주며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조영남으로부터 “박인수가 방송에 나오기로 했는데 목욕탕에서 갑자기 쓰러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박인수는 ‘저혈당’으로 고생했으며 전성기 시절부터 대마초 등 마약의 유혹에 빠져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다.이후 박인수는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가요계의 ‘왕따’로 전락했다.


살아가는 법 모르는 골치아픈 인생

이경우는 고향 속초로 내려가 수산물 가공공장과 재즈클럽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어느 날 윤항기 목사가 운영하는 선교원에서 ‘박인수가 기거하고 있다’고 연락이 와 찾아갔다.

오 갈데 없는 후배를 돌보던 윤항기 목사도 성도들에게 ‘천 원만 달라’는 식으로 민폐를 끼치는 박인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98년 겨울 이경우가 운영하는 속초 블루노트 재즈클럽에 내복도 입지 않고 런닝샤츠 차림에 구두를 구겨 신고 가방하나 달랑 든 버버리 코트의 걸인이 나타났다. 박인수였다. 놀란 마음에 고향친구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취직시켜 주었다.

하지만 고질병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아 휘발류 차량에 경유를 넣는 등 말썽을 다반사로 일으키자 영어학원 강사자리를 주선했다. 영어는 유창했지만 문법을 모르고 말만 하니 또 문제였다.

별 수 없이 박인수의 명성을 기억하는 고향 후배의 야간업소에 소개했지만 웨이터 등에게 민폐를 끼치는 못된 버릇이 도져 쫓겨났다.

마지막으로 무의탁 노인들이 머무는 속초의 양로원에 집사자리를 잡아주었지만 허사였다. 이경우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호소해 와 너무도 괴로웠었다”고 한숨을 내쉰다.

2000년 가을 박인수를 보살펴주었던 전도사에게 연락을 해 서울로 떠나 보낸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2001년 서울로 올라온 이경우는 일산에 ‘하사와 병장 음치클리닉’사무실을 열었다. 처음에는 상계동을 염두에 뒀지만 일이 꼬여 일산에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인수형과 나는 전생의 어떤 연결 끈이 있는 것 같다. 정 목사가 전화를 했을 때 병원이 아닌 어디에 기거하고 있다고 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인수형과는 그저 용돈 주고 연명이나 하도록 도와주는 관계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빼어난 가창력, 라이브 무대의 황제로

본명이 백병종인 박인수는 흑인 노래인 소울의 맛을 제대로 알고 불렀던 가수였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도 “박인수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소울 가수다.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인수는 한편의 소설 주인공처럼 불우한 인생과 가수로서의 영욕을 함께 맛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1947년 9월 3일 평안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6ㆍ25 전쟁 때 북에 남은 아버지와 형과 헤어지고 전북 정읍의 열차 안에서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7세 때 본의 아니게 고아가 됐다.

이후 고아원과 춘천의 미군부대를 2년 간 전전하다 춘천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미 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미국인 토마스의 눈에 들어 1960년 켄터키로 입양됐다. 미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양부모와의 불화로 1963년 홀로 귀국했다.

미8군 무대에서 잡일을 하며 연명하던 그는 타고난 음악성과 미국에서 익힌 리듬감으로 노래실력을 인정 받으며 1965년부터 ‘키보이스’ ‘코끼리 브라더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등 수 많은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노래 생활을 시작했다.

1966년 키보이스와 청계천 3가 센추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활동하며 일반무대로 진출했고 1967년부터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며 빼어난 가창력으로 라이브 무대의 황제로 통했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본능적인 음악 감성이 몸에 뱄다”고 말한다.


‘봄비’ 폭발적 인기, 기행으로 스스로 자멸

그의 음반 녹음은 1969년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노래의 백코러스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1970년에 결성된 신중현 그룹 ‘퀘션스’의 데뷔앨범에 ‘봄비’를 취입,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거머쥐었다.

신중현곡 ‘봄비’는 그룹 ‘덩키스’의 보컬 이정화가 1969년 최초로 노래했다. 차분한 보컬로 노래한 이정화의 오리지널 ‘봄비’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폭발적인 소울 창법으로 노래하는 박인수가 신중현의 권유로 이 곡을 재취입하자 당시 대중들은 ‘이정화는 봄비고 박인수는 소낙비’라며 다이나믹한 박인수의 ‘봄비’에 열광했다.

이후 박인수는 소울과 사이키델릭 등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이 땅에 수혈하는 음악 전도사로 2장의 독집 앨범을 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대마초사건은 그에게 활동금지의 족쇄를 채웠다. 진보적인 그의 독집 음반들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발매가 금지됐다. 또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인 그는 공연을 밥 먹듯이 펑크 내는 등 어느 누구와도 화합하지 못했다.

1972년, 1982년 두 번의 결혼으로 1남 1녀를 두었지만 방랑벽이 심해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해금이 된 1980년 박인수는 또 하나의 불후의 명곡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라는 독집 음반과 1989년 재즈가수인 선배 김준의 도움으로 마지막 독집음반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텐데’를 의욕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잠적해 버리는 기행으로 스스로 무덤을 팠다.

박인수는 음악적으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최고 가수였지만 삶 자체는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한 불우한 환경으로 황폐화 된 6ㆍ25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소울을 제대로 부르던 나의 우상’이라며 존경을 표시하는 가수 임희숙은 가수분과위원회를 찾아 난색을 표명하던 김광진 위원장을 설득, 7월 9,10일 등촌동 88체육관에서 ‘리멤버 박인수’라는 박인수 돕기 모금공연을 성사시켰다.

1960년대 말 소울 가요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펄 시스터즈도 박인수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막 데뷔한 우리들에게 소울곡에 맞는 제스처와 창법을 가르쳐준 오빠였다”며 치료비를 선뜻 내놨다.

이경우는 많은 선후배 가수들이 성금과 모금공연 출연을 자청해왔다며 훈훈한 정에 감동했다. 박인수는 또 정봉인 목사의 노력으로 그리운 어머니와 재회했다.

김준은 “근사한 날에 레코딩 해야지”라며 격려하자 박인수는 “다시 멋지게 노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라며 의욕을 보였다. 박인수의 눈은 어느새 새 생명을 불어줄 ‘봄비’를 기다리는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7/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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