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나미의 홀인원] 길고 짧은건 대 봐야 한다

2위 징크스에 시달리던 ‘수퍼 땅콩’ 김미현 선수가 우승의 낭보를 전해 와 월드컵 이후 무료했던 일상에 활기를 주었다. 그것도 켈리 로빈스(미국)와 매치 플레이 같은 대결 끝에 얻은 성과라 더욱 값진 것이었다.

켈리 로빈스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97년 삼성월드챔피언십 대회 때였다. 그간 로빈스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던 터라 난 그녀가 한국에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을 이루질 못했다. 함께 경기를 하면서 정말 로빈스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로빈스는 프로들 사이에서 말하는 ‘장타자’답게 비거리에서 여느 선수보다도 100야드 이상 멀리 볼을 날렸다. 레이크 사이드 11번 롱 홀에서 다른 선수들이 세번째 샷을 100야드 앞에 두고 피칭 샷을 하는데 반해 로빈스는 4번 우드로 가볍게 투온을 시켜 이글을 잡는 기염을 토했다.

김미현 프로가 이번 자이언트이글클래식 최종 4라운드에서 켈리 로빈스와 동반 라운드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와~~스트레스 엄청 받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로빈스 같은 장타자와 경기를 하게 되면 속으로 ‘드라이버 샷에서 50야드 이상 차이 나면 창피해서 어떻게 경기를 하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아무리 프로라고 하지만 갤러리들과 TV 중계가 되는 대회에서 상대보다 비거리가 크게 뒤지면 위축돼 스윙에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콤플렉스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장타자와의 경기에서 무너지기 십상이다.

김미현 프로는 비록 우승은 했지만 속으로 꿰나 힘든 경기를 했을 것이다. 아마 김 프로가 체격도 비슷하고 비거리도 비슷한 장정 프로와 경기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비거리가 나가면 점수는 안 나와도 스트레스를 받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 정신적 부담을 떨치고 우승한 것이기에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김 프로가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다시는 로빈스 같은 장타자와 경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골프 치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켈리 로빈스 역시 김미현 때문에 심적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비록 거리는 안 나가지만 세컨 샷을 얄밉도록 핀에 갖다 붙이는 김 프로 선수 때문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쌓였을 것이다.

김 프로는 페어웨이 우드에 있어서는 ‘달인’이라고 할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 프로들의 경우 롱 아이언은 말할 것도 없고, 미들 아이언만 돼도 백 스핀을 먹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김미현 프로는 놀랍게도 페이웨이 우드로 그린에 볼을 세우는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다.

아마 로빈스도 이런 김 프로의 신기에 가까운 페어웨이 우드 샷에 기가 죽었을 것이다. 티샷이 짧은 선수가 먼저 세컨 샷을 하게 되는데 투온이 힘들 것으로 보이는 거리에서 페어웨이 우드로 먼저 핀에 붙여 놓는 김미현 프로를 보고 로빈스 선수가 위축되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유독 드라이브 비거리가 많이 나는 L모 프로가 있다. 이 프로는 앞서 치는 선수가 먼저 투온을 시키면 부담을 느껴 경기를 망치곤 한다. 그러고 보니 골프라는 것이 비거리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장단점이 있는 경기인 것 같다.

김미현 프로의 중계 방송을 본 아마추어들은 ‘비거리’ 못지 않게 정확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김 프로가 물리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선수와 플레이를 하면서도 자신의 단점에 집착하지 않고 장점을 살려 주눅 들지 않는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이번 김미현 프로의 우승에서 보듯 너무 자신의 단점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만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더 현명한 골퍼가 되는 것이라고.

입력시간 2002/08/0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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