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탑골공원 원각사지

탑골공원은 본래 ‘파고다공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각사 10층 탑이 있어 탑골, 탑동 또는 원각사 터로도 불렸다. 3ㆍ1운동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곳은 원래 고려 때 세워진 흥복사(興福寺)의 터였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에 성공한 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이 흥복사를 조계종(曺溪宗)의 본사로 삼았다가, 세종 때 아예 폐지하며 공창(公廠)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세조9년(1464년)에 효령대군이 양주(楊州) 회암사(檜岩寺)에서 원각경을 강(講)하면서 여래(如來)가 현신(現身)하여 사리(舍利)를 주는 영험이 있다 하여, 그 이듬해에 흥복사의 터를 크게 다듬고 확장하여 큰 가람을 지으니 이것이 바로 원각사(圓覺寺)다.

세조 13년(1467년)에는 정교한 10층 석탑을 세워, 그 속에 원각경과 사리를 넣었다. 높이가 무려 40여자나 되는 대리석으로 축조한 이 탑은 ‘아(亞)’자 모양의 밑 단 3층 위에 다시 3층까지는 그 중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위의 7층은 사각형으로 되어 층마다 사면에 보살, 신장들을 빈틈없이 정교하게 새겨 두었다.

그 조각 솜씨가 가히 조선시대 작품 가운데 걸작품으로 꼽혀 국보 제2호로 지정됐고 더 이상의 풍화마모 방지를 위해 유리집 속에 보호되고 있다. 탑골공원안 한 쪽에는 원각사의 내력을 알리는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서있다.

성종 2년(1474년)에 세워진 이 비는 높이 4.94m, 너비 1.3m로 화강석 거북받침에 용의 머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거북받침은 연잎 자리로 되어있고, 용의머리는 쌍룡이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형상을 정교하게 새겨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석의 앞면 윗쪽에 ‘대 원각사의 비(大圓覺寺之碑)’의 여섯 글자를 전서체로 새기고 그 밑과 뒷면에 원각사를 창건한 사실을 새긴 하나의 역사책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앞면의 글은 김수온이 짓고, 글씨는 성임이 썼으며, 뒷면의 글은 조선조의 대문장가 서거정이 짓고 글씨는 정난종이 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500년 가까운 세월의 풍우에 글씨는 퇴색되었고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총탄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 원각사에 연산조 10년(1504년)에 승려들을 모조리 쫓아 내고 기녀들을 끌어 들여 질탕하게 잔치판을 벌이기 위한 연방원을 차렸다. 급기야 중종조에 이르러 아예 문을 닫게 되어 10층 탑과 원각사비만이 숲속에 유령처럼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조말 고종년간 광무1년(1897년) 영국인 고문 브라운이 이 자리에다 공원을 조성한 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공원이 됐다.

나라가 일제의 강점으로 암울했던 시기인 1919년 3월1일을 기해 이 공원에서 독립투사들이 모여 대한독립을 선언한 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 단순한 공원이라기보다는 성소(聖所)가 되었다.

탑골공원 원각사탑에, 그리고 3ㆍ1 운동 기념탑이 함께 아우러지고 있으니, 어찌 탑골의 땅이름과 무관하다 하랴!

입력시간 2002/08/0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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