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읽기] 복제의 시대, 문화적 욕망의 충돌

"한국여성 1명 인간복제 배아 임신중."

7월 23일 인터넷 뉴스 그룹에서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헤드 카피였다. 클로네이드(clonaid) 한국지사는 인간복제 실험에 한국인을 포함해서 전세계적으로 50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클로네이드는 종교단체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설립한 회사로서, 이들은 미확인 비행물체(UFO)를 타고 지구에 온 외계인 과학자들이 복제과정을 통해 인류를 만들어냈다고 믿고 있다. 6개월 내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니 두고보면 저절로 알 일이다.

과학사를 전공하는 주변의 지인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전공자답게 그들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1997년 영국 로슬린 연구소에서 복제양 돌리를 만들 때에도 277번의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유산이 되거나 또는 출생 직후에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고 기형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아직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체세포를 통한 생명복제의 여러 성공사례들이 발표되긴 했지만, 복제성공률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전공자들은 인간복제로 대변되는 개체복제 실험이 시행됨으로써 생명공학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심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더 우려하고 있는 듯했다. 치료용 배아 복제의 허용 여부를 두고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부의 법률 시안이 상충되는 양상을 보였고, 결국 국가생명윤리 자문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게 된 시점이었기에 더더욱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미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밝혀졌고, 유전자 연구의 후발주자인 우리의 경우 포스트 게놈프로젝트 시대를 대비한 학문적인 연구가 절박한 상태라는 것이 전공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미 선진국들이 유전자 연구와 활용을 독점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대중의 인식이 유전공학이란 인간복제와 관련되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존엄성 훼손을 가져올 것이라는 쪽으로만 편향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간복제라면 코미디 영화 멀티플리시티의 황당함이나 아놀드 슈워츠제네거가 출연한 영화 6번째 날의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떠올릴 따름인 필자로서는 무엇보다도 감각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유전자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현실적인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SF소설은 일상적으로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불려왔는데, 이제 더 이상 공상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허황한 상상(공상)을 이미 현실적인 차원에서 추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스트 게놈프로젝트 시대에 인문사회과학이나 문화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찾아나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패러다임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 설정되어 있었다. 인간은 완전성의 이념과 동물적인 본능 사이를 방황하는 존재였다.

이제 우리는 기계(사이보그)와 괴물(생물학적인 변종)과 공존하는 그 어떤 존재로서 인간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인간을 생물학적인 순종(純種)에 근거한 고유한 가치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관념을 조금씩 수정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생명체와 전자공학의 결합체인 '바이오 칩'이 우리의 몸과 만나게 될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때의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이면서 생물학적 변종이 될 수 있다.

2002년 7월의 문화적 키워드는 김남일, 소리바다 그리고 인간복제이다. 멋진 터프가이 김남일을 논외로 한다면, 소리바다는 디지털 기술의 복제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고 인간복제는 생명공학에서의 복제 문제이다.

소리바다의 정보공유가 저작권과 충돌하고 있다면, 인간복제는 인간의 존엄성(고유함)을 위협하고 있다. 기술복제와 생명복제의 시대에 과연 문화의 자리는 어디일까. 아마도 문화는 복제가능성의 틈 사이로 복제불가능성을 욕망하고 꿈꾸는 일이 아닐까 한다.

복제가능성으로부터 탈주(脫走)했다가는 다시 복제의 메커니즘에 갇히고 또다시 탈주하는 욕망의 흐름들과 유사한 양상일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언제나 복제가능한 시대라면, 복제의 메커니즘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들 역시 그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복제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흥미진진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입력시간 2002/08/0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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