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철언 전 장관 "85년 남북정사휘담, 미 반대로 무산"

DJ 정권은 깜짝쇼 치중으로 대북주도권 상실

“1985년 김일성 주석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지만 국내 분위기가 급변해 우리측이 거부했다”

박철언 전 장관은 7월 26일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며 “특히 미국이 남북한이 비밀 창구를 통해 비밀 논의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반대해 정상회담이 무산 됐다”고 밝혔다.

박 전장관은 “현 DJ 정권은 대북 정책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황임에도 단기간에 성과를 올리겠다는 과욕에 ‘깜짝쇼’에 치중하다가 기회를 상실했다”며 “지금 북한은 변화를 위해 남측과 서방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어 이를 충분히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대북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박 전장관은 “3당 합당 후 YS가 수 차례 차기 대선에서 밀어줄 테니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내각제 개헌을 포기한 3당 합당은 집권을 위한 야합에 불과하다”며 자신이 단호히 거부하는 바람에 YS와의 관계가 악화됐다고 털어 놓았다.

이밖에 박 전장관은 전문가로서 대북 관계에 대한 정부의 대응방식, 3김과의 3당 합당 과정 비사, 대북 밀사 시절의 뒷이야기, 그리고 YS와의 소련 방한 중 빚어진 해프닝 등에 대한 비사들을 공개했다.


북한과 42차례 목숨 건 비밀접촉

- 2년 여간 정치권에서 물러서 있는데.

“3김으로 대표되는 기성 정치 지도자들에 실망과 환멸 때문입니다. YS와는 내각제를 전제로 3당 합당을 했다가 약속을 짓밟혔고, JP와는 충청도 당이 아닌 개혁적 보수를 해 나가자는 다짐이 무산 됐습니다. 5년전 DJ와는 근대화와 민주화 세력의 대타협을 바탕으로 한 미래 지향적인 DJP 연합을 하자고 했는데 지역 편중 인사와 부패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또한 4ㆍ13 총선에서 대선 당시 DJ 지원했다는 대구 시민들의 거부 반응 때문에 참담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유권자들 마저 인물이 아닌, 지역 감정에 의한 바람몰이에 따라 움직인다는 정치 비애와 환멸을 느껴 정치를 일단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 1980년대 밀사 대표로 북한을 21차례나 방문한 북한 전문가로서 현 정부의 햇볕 정책을 평가한다면.

“1985년 7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대통령의 전권을 위임 받은 고위급 비밀회담 수석대표로 북측과 42차례의 비밀 접촉을 가졌습니다. 당시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으로 한반도가 전쟁 일보 직전의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시작한 남북 고위급 비밀 접촉이었습니다.

DJ 정권의 ‘햇볕정책’은 정상 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에 상당한 진전을 가져온 것은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DJ 정권은 대북 정책의 속도, 내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임기내에 성과를 올리겠다는 과욕으로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다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국민적 공감대와 합의 토대 위에서 추진되어야 할 남북 관계가 ‘깜짝쇼’ 방식이 되다 보니까 한계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남측과 북측이 서로를 끌어 안는다는 점에서 ‘햇볕정책’이란 표현보다는 ‘포용정책’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 밀사 방북 당시 남북간에 정상 회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시 정상 회담의 분위기가 상당히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1985년 가을 전두환 전대통령 때도 고위급 비밀 창구에서 정상회담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를 하고서도 우리측의 입장이 바뀌어 안 한 것입니다.”

-남북 정상 회담을 우리측이 거부했다는 뜻입니까?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전두환 전대통령 시절에는 ‘만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비밀 접촉을 시작 했습니다. 1985년 9월 장세동 안기부장과 같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에 대해 거의 합의를 봤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우리측의 분위기가 엄청나게 변화돼 있었습니다. 그 때 노신영 총리를 비롯한 남측의 분위기, 그리고 미국의 입장이 문제가 됐습니다. 당시 ‘이 시기에 남북정상 회담을 평양까지 가서 할 필요가 없다’, ‘다음 회담 일시에 대한 확답을 받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수석 대표인 저에게 ‘우리가 너무 (정상회담을) 몰아가지 말고 미루는 방향으로 가라’는 비밀 지침이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해 말부터는 우리가 회담을 미루었습니다.”


미국ㆍ국내 보수주의자들이 제동

- 당시 김일성 주석이 정상 회담을 수락했습니까?

“우리 측이 (정상회담을) 먼저 제의를 했고 김일성 주석이 좋다고 했습니다. 김 주석이 북한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평양이든 서울이든 제3국이든 좋다고 했습니다. 만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대강 원론적인 합의만 하고 나머지는 실무 회담에 맡기자는 것이 당초 우리측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측에서 ‘문제가 있다’며 반대를 했습니다. 남북이 직접 비밀 접촉 창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쑥덕쑥덕 하니까 (미국이)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여기에 국내 보수주의자들도 제동을 걸었습니다.”

- 노태우 전대통령 때도 정상회담 논의가 있었습니까?

“노 대통령 때 와서는 준비를 다 한 뒤에 정상회담을 하자는 쪽으로 입장이 바꿨었습니다. 남북 쌍방이 양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을 내놓는 선에서 비밀 접촉을 벌여왔고, 실제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완전 합의를 본 게 1991년 11월 13일 남북 총리간의 기본 합의서 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연결되게 됐는데 그것도 결국 무산됐습니다. 1990년 3당 합당 후 제가 김영삼 대표와 충돌하게 되고, 내각제 문제로 투쟁을 시작하고 하면서 남북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보듯 남측의 포용정책은 DJ 정권에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 북한이 일부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고 있는데 바람직한 대북 관계는.

“북한은 노태우 정권 초기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변화를 단기간에 이용하기 보다 경제ㆍ외교적 우위에 있는 입장에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포용할 것은 포용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대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분명히 짚고 가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 서해교전에 대해 북한은 애매한 유감 표명을 했습니다. 북한의 사과 표명과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은 크게 미흡하지만 일단 평가하고, 앞으로 남북 회담에서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집고 나가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주무장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명백한 사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사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북한은 지금 한국을 비롯한 서방의 지원이 절실 합니다. 미국이 대북 압박정책을 하고 있고, DJ 정권의 임기는 6개월 밖에 남기 않았습니다. 북한은 이 정권 내에서 자기들이 받을 것은 받고, 제도적으로 풀 것은 풀어서 제도화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의연하게 대북 정책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 3당 합당 당시 공개 안된 밀화를 소개한다면.

“YS는 합당 3일전까지도 2당이 합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JP도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합당 발표 3일전에 YS와 만나 ‘내각제 개헌을 하려면 국회의원 3분의 2의 의석이 필요하니 JP도 포함해 3당이 합당을 하자’고 처음 말했습니다.

처음 YS는 ‘JP는 수구적 시각을 갖고 있다’며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JP에게도 마지막에야 YS를 포함한 3당 합당의 언질을 주었습니다. 당초 계획으로는 오전 10시에 YS와 합의하고, 오후 2시에 JP와 합의를 한 뒤 나중에 3당 합당을 극적으로 발표 하기로 했는데, JP가 ‘우리는 곁다리냐, 같이 만나자’고 주장해서 오전에 3당 합당을 선언한 것입니다. 막판에 몇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 DJ는 3당 합당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DJ와도 많이 접촉 했습니다. DJ도 긍정적으로 검토를 했습니다. DJ와는 은밀히 계속 접촉할 수 없어 당시 김원기 원내총무와 비밀리에 몇 번 만났습니다. 1990년 1월 노 전대통령과 각당 영수 회담이 있기 하루 전 김원기 총무에게 ‘내일 함께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영수 회담에서 DJ는 노 전대통령에게 ‘평생 야당 인으로 국가적 일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겠지만 양당 통합에는 동참할 수 없다. 야당의 지도자로 대선에서 당선돼 경륜을 펴보고 싶다’며 거부 했습니다. 노 전대통령도 군부, 영남 정서 때문에 DJ와의 통합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습니다.”


YS “나 밀어주면 다음은 당신 차례”

- 3당 합당 후에 YS와 불화를 겪었는데.

“불화의 원인은 간단합니다. 3당 합당은 내각제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통합 발표를 하려는데 YS가 ‘내각제 합의 사실에 대한 발표는 당분간 미루자’고 했습니다. 아직 민주계 인사들에게 설명을 못했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했습니다.

3당 합당 1개월 뒤인 2월 25일 심야에 YS가 급히 보자고 해서 김현철 군의 아파트로 가서 만났는데 YS가 또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YS는 ‘노통과 박 장관이 밀어주면 내가 쉽게 대통령이 될 것이니, 다음 5년 뒤에는 박 장관이 (대통령을) 하도록 최대한 밀어주겠다’고 제의 했습니다.

저는 ‘역사와 국민을 위해서 내각제가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절대로 안 된다. 내각제를 안 하면 절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단언하게 반발했습니다. 대선 3개월 전까지 YS는 수차례 직접 내각제 포기와 자신을 도와 달라며 요청해 왔지만 저는 ‘내각제라는 이념적 기초가 빠진 3당 통합은 권력을 잡기 위한 야합이다’ 라며 끝내 거부했습니다. 그 때 YS와 깊은 골이 생긴 것입니다.”

- 소련 등 동구권과의 수교 과정에서 비사가 있을 텐데.

“1988년 여름 노 전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들어가 소련 외무성과 비밀 협상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YS가 소련 방문을 하면서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YS가 고르바초프 집무실 밖의 부속실에서 기다리다가 고르바초프와 악수만하고 2~3분 정도 인사 나눈 것을 가지고 ‘고르바초프와의 단독 회동을 통해 소련과의 모든 합의는 끝났다.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동행 기자들에게 전격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 제가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YS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유모씨라는 재소 동포를 통해 고르바초프와 인사라도 하려고 부랴부랴 찾아간 것입니다. 차 한잔도 못하고, 합의 문서도 없이, 사진 한장 못 찍고 온 것을 가지고 YS는 ‘모든 합의가 끝났다’고 발표 했습니다.

다음 날 소련측에선 아무 합의된 게 없는데 YS가 일방적으로 발표를 했다며 더 이상 비밀 협상을 진행시킬 수 없다고 저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YS에게 ‘비밀 협상 진행을 위해서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며 자제를 요청했습니다. 본국에 돌아와서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노 전대통령이 YS에게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그 일로 YS는 ‘박 장관이 내 발목을 잡는다’며 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3김의 피해자, 연말쯤 거취 결정

- 문민 정부 이후 정치적ㆍ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저는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명약관화한 대선 2개월여전에 탈당했습니다. 삭풍과 눈보라 치는 겨울 들판에 혼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구속 등 파란 만장한 10년 여의 힘든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YS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저를 비롯해 제 주변 사람들이 국가 수사기관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 정계 복귀 계획은.

“저는 3김의 가장 철저한 피해자 입니다. 다시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치를) 한다면 가시적인 청사진이 보일 때가 될 것입니다. 대선 전이나 대선 후, 아니며 다음 총선 때가 될 것입니다.”

송영웅 기자

입력시간 2002/08/09 16:43


송영웅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