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대생 인수 포기는 적전상 후퇴?

김승연회장 입찰 포기 시사, 진의·배경 놓고 재개, 정부 촉각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포기 시사는 예정된 수순인가, 아니면 계산된 제스처인가.

7월 29일 “대생에서 마음이 떠나고 있다”고 말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해석이 분분하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 회장은 “1조원이 넘는 자금을 들여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며 “인수 의사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고 말해 대생 입찰을 포기할 것임을 시사했다.

대생을 인수하겠다는 의지도 협상과정에서 50%로 약화했고, 최근에는 20~30%로 줄어 들었다며 심경의 변화과정도 전했다. 대생 인수를 두고 김 회장이 외부에 발언한 것은 물론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앞서 5월 27일 그룹 경영진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생 인수를 포기할 수 있다”고 발표한 것도 배경은 다르지만 실은 김 회장의 생각이란 점에서 그의 고민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생 인수팀의 활동 중지, 대생인수 포기를 전제로 한 차세대 사업군 모색 등도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김심(金心)의 변화를 시사하는 강력한 징후들이다. 더구나 대생 인수라는 사업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나타낸 것은 정부의 인수자격ㆍ가격 논란에 대한 맞대응 성격이 강했던 5월의 대응방식과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경영전략 궤도수정인가?

대생 매각 건은 공적자금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측과 한화간의 줄다리기로 진행돼 왔다.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공자위는 대생을 한화에는 주기 싫다는 입장을 보여, 팔려는 쪽이 열쇠를 쥔 것처럼 보였다.

공자위는 올들어 대생의 가치를 재평가하며, 과거 한화종금 정리과정에서 공적자금이 투입된 것을 문제삼아 한화가 과연 인수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시비를 벌였다.

그러나 대생을 인수하겠다는 새로운 인수 희망자가 나오지 않고, 정부의 구조조정 차질 등으로 문제가 복잡하게 꼬이면서 매각 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재경부 등 정부가 나서 한화그룹에 대한 인수 자격에 면죄부를 주어 현재 공은 한화에 넘어간 상태다. 그런데 김 회장이 이번에는 줄다리기의 다른 편인 한화측에서 줄을 놓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김 회장은 1981년 재계 최연소인 29세의 나이로 재벌 총수에 취임한 이후 기업 인수를 통해 사세를 키워왔다. 회장 2년차이던 82년 전 임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화학을 인수해 그룹의 효자기업으로 키웠고, 이듬해에는 경인에너지의 외국인 지분을 인수해, 석유화학이라는 새 업종을 그룹에 추가했다.

꼭 성공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두둑한 배짱과 추진력이 화약과 기계업종에 제한되던 한화그룹을 지금의 면모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96년에는 우성그룹 인수를 검토하다 실무진들의 의견을 수용해 결국 인수를 포기하는, 경영자로서 원숙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화측은 “10대 그룹 오너중 유일하게 회사경영을 22년째 맡고 있어 경영능력에서 전문경영인의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화는 구조조정을 잘 한 기업으로 꼽히는 등 이번 정권 들어 기업 이미지를 변신시켰지만, 최근 사업에선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96년 뒤늦게 뛰어든 정보통신 부문 사업의 경우 지난해 사실상 실패를 선언했다.

성장위주 경영으로 97년 말 32개 계열사에 부채비율 1,200%로 위기에 봉착한 뒤 한화가 다시 안정을 되찾기까지 김 회장은 경영퇴진이란 배수진을 치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안정을 되찾고 그룹의 모토도 내실에 맞춰져 있지만, 아직 그룹의 주력 부문이 명확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는 게 업계의 인식이다.


녹록치 않은 외부여건

한화가 경쟁사들로부터 ‘다윗이 골리앗을 먹는다’는 식의 비아냥까지 들으며 대생 인수라는 최대 모험을 감행한 것은 이 같은 성장엔진의 필요성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김 회장은 3년전 대생 인수를 공식화한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수의지를 강조해왔다.

올 10월 창립 50주년을 맞아 연초에 발표한 구상에선 대생 인수를 통해 금융부문을 향후 그룹의 주력업종으로 삼겠다고 발표하고, 자산 유동화를 통한 인수자금 확보에 주력해왔다. 올 봄 국내 보험업계 1위 삼성생명을 보유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을 만나 보험경영에 대한 한 수 지도를 부탁할 만큼 대생 인수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대생 인수를 기정사실화해 온 김 회장의 심경에 변화를 가져온 요인은 복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부분은 아직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와, 특히 국내 금융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선진 보험사들과 치열한 경쟁이 벌여야 하는 외부 여건이다.

과연 한화가 대생을 인수해 살아 남을 지가 고민거리인 셈인데 미국의 전문가들로부터는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의 발언이 단순이 공자위 압박용이라고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사정은 또 있다.

대생 인수를 위한 한화 컨소시엄에 참여한 세계 최대의 리스업체인 일본 오릭스는 공시 및 회계부정에 대한 의혹을 받고 있다. 오릭스는 일본 증권거래소에 정직하게 공시를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최근 주가가 3년 이내 최저가격으로 떨어진 상태다.

오릭스는 일본내 기업금융과 공시의 표준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의 기업이었던 만큼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외신들은 전망하고 있다. 아직 오릭스 문제는 미국의 엔론과 같은 회계부정 사태로 번지고 있지는 않지만, 대생 인수 컨소시엄의 도덕성을 놓고 정부 내에서 재차 논란이 일어날 여지가 남아 있다.

바깥 시선과 달리 한화그룹측은 김 회장 발언에 대해 아직 ‘살’을 붙이지 않고 있다. “말한 그대로 보면 된다.

대생 인수 포기 문제는 김 회장 귀국 후 내부 논의를 거친 뒤에 최종 결정이 날 사안”이라는 회사 관계자의 말도 같은 취지다.

한편으로 김 회장의 발언이 회사 경영진과 의견조율을 거치지 않고 나온 돌출발언으로 축소 해석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여기에는 최종 의사결정자인 김 회장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그룹으로선 우선 당장 새로운 대안을 찾기 어렵다는 속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국내 기업 인수시장에 새로운 변수

대생 포기시 연초 대생을 주축으로 한 금융사업군과 유통 및 레저사업군, 기존 제조업군을 핵심역량 사업으로 제시한 한화의 구상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국내 기업인수 시장은 막강한 현금을 앞세워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고 있는 SK와 롯데에 이어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게 된다. 한화로선 대생 인수 추진으로 입은 금전적 시간적 손실을 보상하는 새로운 엔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화는 그 동안 대생 인수를 위해 자금을 쌓아두고, 무주리조트 인수 등 사세를 넓힐 기회를 다른 기업에게 넘겨줘야 했다.

현재 한화그룹측은 8월 중순 이전까지는 김 회장이 귀국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젊은 나이에 경영대권을 쥔 김 회장은 일부러 나이가 들어 보이도록 머리를 올백으로 올리고, 양복도 더블재킷만 입던 스타일을 지금도 고집하고 있다.

일관성을 중시하는 그의 이 같은 스타일이 대생 인수에서도 과연 성공의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이태규 기자

입력시간 2002/08/09 17:29


이태규 t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