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에서 건진 한국최초 포크음반

트윈 폴리오 데뷔앨범 '아이 러브 유' 보다 5년 앞서

한국의 포크 가요사를 새롭게 쓸 포크 음반이 발견됐다.

가요계는 지금까지 1969년 6월 지구레코드에서 발매된 ‘트윈 폴리오’의 데뷔음반 ‘아이 러브 유’(김인배 작ㆍ편곡)를 한국 최초의 포크 음반으로 공인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발견된 음반은 이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져 가요 관계자들이 흥분하고 있다.

화제의 음반은 1964년 4월 라-스카라 레코드에서 발매된 서수남, 하청일이 주축이 된 남성 4인조 포크그룹 아리랑 부라더스의 ‘우리 애인은 미쓰 얌체’(LSL 001,64년)이다.

일본의 한국 가요 음반 수집가들은 그 동안 이 음반의 존재를 말해왔으나 우리 가요계는 이 같은 음반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이 음반은 최근 서울 은평구의 한 고물상에서 발견됐는데 ‘아리랑 부라더스’가 부른 14곡이 수록되어 있다.


2면의 '상팔자'는 국내 최초의 포크창작곡

수록곡들 중 대부분은 브라더스 포의 그린 필드를 번안한 ‘푸른들’등 당시 시중에서 인기 있는 포크 레퍼토리였다. 수록곡들 중 음반 2면 마지막 곡인 ‘상팔자’는 국내 최초의 포크 창작곡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음반이 발견된 것에 대해 대중음악연구가 김형찬씨는 “우리의 포크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대중 음악 연구가들은 물론 가요계도 앞으로 상당히 연구할 만한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씨는 이어 “이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을 들어보면 ‘아리랑 부라더스’가 1964년이라는 시기에도 불구하고 외국 음악을 나름대로 소화하려고 노력한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아리랑 부라더스’의 리더였던 가수 서수남(60)씨도 “당시 이런 음반을 제작했다는 기억조차 없었는데 나 자신도 놀랐다”면서 “미국에 이민간 하청일도 이 소식을 들으면 반가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씨는 이어 국내 최초의 포크 곡인 것으로 추정되는 ‘상팔자’에 대해 “내가 작곡을 하지 않고 악보만 받아 작곡자의 이름이 기억 나지 않지만 분명한 창작곡”이라고 주장했다.


트로트인기 잠재운 뉴 에이지 열풍

포크 음악이 국내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초. 당시 DJ들이 미 8군을 통해 흘러나온 음반을 명동 심지다방, 세시봉, 종로 뒤세네 등에서 소개하면서부터. 미국의 밥 딜런 같은 저항적인 프로테스트 포크와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 포, 피터 폴&메리 같은 달콤한 상업 포크가 이 땅에 상륙하자 대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청년 문화 태동의 ‘주범’ 역할을 했던 통기타 바람은 이때부터 불기 시작한 것이다. 서씨는 “한양대 2학년 때인 1962년 동아 방송에서 주최한 전국대학생 중창단 콩쿨대회에 서울대 공대 조선항공과 음악친구 홍광식과 듀엣으로 참가해 외국 통기타와 우크레레(하와이 민속악기)를 치며 포크 곡 ‘I DO ADORE HER’(동물농장의 원곡)와 ‘COME BACK LIZA’를 불러 1등을 했다”면서 “이미 대학가에는 통기타를 치는 학생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었다”고 밝혔다.

1961년 미 8군 가수 한명숙과 1964년 최초의 록 그룹 ‘에드훠’, 1964년 최초의 포크그룹 ‘아리랑 부라더스’등은 당시 주류 음악이었던 트로트의 인기를 떨어뜨리면서 ‘뉴 에이지’돌풍을 일으켰었다.


서수남·하청일 주축 4인조 그룹

’한국의 브라더스 포’를 꿈꿨던 최초의 포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는 가장 먼저 우리말 포크송을 발표했으며 랩의 초기형태인 만요식의 재미 있고 경쾌한 리듬을 대중들에게 소개한 숨겨진 선구자들이다.

당시 멤버는 서수남, 하청일(중앙대), 천정팔(전남대), 석우장(모 음대 성악과 출신) 이었다. 서수남은 고교 시절에 세기음악학원에서 3개월간 기타교습을 받으며 날마다 AFKN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노래에 심취했다.

1961년 한양대 화학과에 입학하며 ‘국풍81’의 원조격으로 1962년 동대문 운동장에서 개최된 MBC주최 ‘5ㆍ16군사혁명 1주년 기념 콩쿨 대회’에 참가했다. 스탠드를 가득 메운 수만 명의 관중들 앞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OH LONESOME ME’등 외국 팝송을 불렀다.

대상은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에 돌아가고 차석인 1등상을 수상했다. 이때 서수남을 눈여겨보았던 대한합창단 멤버들인 하청일과 박창학(중앙대), 최용삼(서울대 음대) 등이 보컬그룹 결성을 제의해왔다. 이들은 워커힐 쇼단의 제2의 멜로톤 쿼텟을 꿈꾸며 팀을 결성했다.

그러나 최용삼과 박창학은 팀을 탈퇴, 성악을 전공하던 또 다른 합창단원 석우장과 천정팔로 멤버교체가 되었다. 하청일의 음악 친구였던 명동 심지다방 DJ 이강은 절묘한 화음을 구사하는 음악 친구들을 당시 대도레코드 녹음기사인 친형 이청씨에게 소개했다.

현재 유니버샬 레코딩 스튜디오 사장인 이청(63)씨는 아카펠라 뿐만 아니라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멋들어진 화음을 구사하는 이 그룹에 매료돼 새로운 음반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낮에는 본업인 녹음기사로 일하고 밤에는 멤버들을 마장동 스튜디오로 불러 도둑질하듯 마이크 2개로 1 트랙 동시 모노 녹음 작업을 강행했다.

서수남은 외국팝송 레퍼토리들을 번안해 편곡과 통기타 연주등 멜로디작업을, 하청일은 바리톤과 하모니카, 천정팔은 베이스, 석우장은 테너 파트를 맡았다.

팀 이름은 제작자 이청의 제안에 따라 한국정서를 담은 ‘아리랑 브라더스’로 정했다. 한달 간의 녹음작업 후 이청은 ‘라-스카라(LA SCALA) 레코드사’를 창립, 한국 최초의 포크 음반인 “우리 애인은 미쓰 얌체”를 발매했다.


사회정서 풍자한 노랫말과 멜로디

1964년 4월 발표된 ‘아리랑 부라더스’의 초판 독집 앨범은 홍보용으로 200장이 제작됐으며 언론과 가요 관계자들에게 배포되었다.

특히 수록곡들 중 ‘동물농장’ ‘웃어주세요’(도미니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AFKN을 즐겨 듣던 대학생 등 젊은 층들은 외국 포크곡들이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말로 흘러나오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물농장’이 히트할 조짐을 보이자 1960년대 당시 최대 도매상이었던 청계천 4가의 흥음사, 서울소리사, 낙원동의 영락레코드 등 도매상들이 제작자 이청에게 음반을 주문해왔다. 이청은 급히 재킷그림을 수정하고 타이틀곡도 ‘동물농장’으로 변경해 300여장을 추가로 발매했다. KBS 와 MBC 라디오는 이들의 곡들을 하루에도 수 차례 방송하기도 했다.

‘아리랑 부라더스’는 여세를 몰아 1964년 9월 뮤지컬 형식으로 인기가 높았던 시민회관의 16회 ‘프린스 쇼’에도 출연했다. 당시 최초의 교양지로 창간됐던 ‘주간한국’은 이들에 대해 ‘스피디한 진행과 흥겨움을 보여준 새로운 무대 매너는 쇼의 유일한 볼거리였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대중음악연구가 김형찬씨는 “이들이 부른 곡들의 가사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짧고 코믹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면서 “창법도 개성을 중시하는 컨츄리 음악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면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김씨는 이어 “미국 포크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트윈 폴리오’는 당시 도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세련된 화음과 창법으로 표현했지만 ‘아리랑 부라더스’는 당시의 사회상과 정서를 코믹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했다”고 평가했다.

‘동물농장’은 이후 통기타 가수 서유석에 의해 ‘사모하는 마음’으로 재번안되어 발표됐으며 쉐그린은 좀더 코믹하게 ‘동물농장’을 리메이크해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년 정도 활동을 했던 ‘아리랑 부라더스’ 멤버들은 워커힐 쇼 오디션을 받았다.

쇼 매니저는 통기타를 치며 맛깔 난 화음을 구사하는 이들의 노래에 반했지만 기형적으로 키가 크고 못생긴 서수남이 영 못마땅했다. 서수남을 제외한 3명에게 ‘새로운 팀을 만든다면 출연시키겠다’는 비밀제의가 왔다. 화려한 워키힐 쇼 무대 진출을 꿈꾸던 서수남은 멤버들이 자신을 빼고 몰래 노래연습을 하고 있음을 알고 절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큰 키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서수남은 배신감을 느끼자 팀을 탈퇴하고 학교마저 휴학했다. 서수남은 ‘아리랑 부라더스’시절 취입했던 ‘사랑하는 마음’(Before this day end)으로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해 솔로로 독립했다.

리더가 빠진 ‘아리랑 부라더스’는 워커힐 무대를 밟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했다. 1965년 미8군 무대에 진출해 코미디를 곁들인 타고난 끼로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서수남은 1967년 미국 내쉬빌 음악을 표방한 5인조 ‘그랜드 올 오프리’ 컨츄리 밴드를 결성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만든 음반

서수남은 당시 가수가 되고자 자신을 찾은 원로가수 고(故) 현인의 딸인 KBS 성우 현혜정을 만났다. 그는 현혜정과 혼성 듀엣을 결성,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결혼했으나 한 달 만에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서씨는 “현혜정은 일본으로 진출하기 위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면서 “결국 6개월 만에 이혼했다”고 밝혔다. 서수남은 당시 이혼의 상처 때문에 목숨처럼 아껴온 포크, 컨츄리, 웨스턴 관련 외국음반과 자료들을 몽땅 불태워 버렸다.

서수남이 그동안 ‘아리랑 부라더스’에 대해서도 일절 말하지 않았던 것도 그때의 고통스런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씨는 “희극적인 노래들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서수남은 이후 1969년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에 음악배필 하청일과 재결합하며 남성듀엣으로 재기했다. ‘동물농장’ ‘팔도유람’등 특유의 코믹송과 동요음반으로 폭 넓은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서수남은 방송MC 등을 거쳐 현재 대학강의와 ‘주부가요교실’을 병행하며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청일은 운영하던 야구용품 제조업체의 부도 후 미국으로 이민,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석우장은 성악을 계속 공부해 미국 LA에서 성악가로 활약하고 있다. 유일하게 천정팔 만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국 최초 포크음반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이청은 1960년 한양대 전기과에 입학했으며 1962년 킹스타 레코드의 보조녹음기사로 가요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트로트 계열 녹음기사 최성락과 함께 진보적인 음악인 포크와 록 사운드 전문녹음기사로 명성을 날렸다.

이청은 유니버샬, 대도레코드를 거치며 신중현의 록 음반, 김민기의 데뷔 음반 등 한국 가요의 주요 음반 녹음을 담당했던 대중가요녹음사의 산 증인이다.

이청은 “당시 ‘아리랑 부라더스’의 음반을 제작한 것은 돈을 벌겠다는 것보다는 기념비적인 음반을 만들겠다는 열의 때문이었다”면서 “까맣게 잊었던 이 음반이 발견돼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청은 현재 마장동의 유니버샬 레코딩 스튜디오 사장 겸 원로녹음기사로 음악과의 인연을 계속맺어 가고 있다.


대학가 포크 열풍의 촉매 역할

‘아리랑 부라더스’의 음악 혁명은 이 음반 하나 밖에 발표되지 않아 포크의 대중화에 기여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대학가에 포크 열풍을 몰고 오는 촉매 역할을 했다. 견고했던 트로트 아성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뿌린 포크 씨앗은 1964년 전석환의 ‘싱어롱Y’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1966년부터 대학가에는 윤형주가 주축이 된 연세대의 ‘라이너스’등 포크 그룹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1967년 11월 3인조로 출발한 ‘세시봉 트리오’를 거쳐 듀오 ‘트윈 폴리오’가 1968년 2월에 등장, 포크는 비로소 대중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이들 포크 곡은 대부분 외국 노래를 번안한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한국 포크는 1968년 11월 남산드라마 센터에서 한대수의 창작 곡이 발표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최초로 포크를 도입해 대중가요를 한 단계 발전시킨 ‘아리랑 부라더스’. 이들의 선구자적 음악 실험은 다시 정당하게 평가돼야 한다. 한국 포크 역사는 ‘아리랑 부라더스’를 출발점으로 시작해 다시 쓰여져야 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8/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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