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다룬 오페라 ‘눈물 많은 초인’ 공연

뉴 서울 오페라단(단장 홍지원)이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삶을 정제된 오페라 무대로 되살린 ‘눈물 많은 초인(超人)’을 공연한다. 그의 삶이 오페라 버전으로 재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박정희는 이순신, 원효 등 역사적 인물에 이어 창작 오페라 형식으로 삶이 재조명되는 인물의 반열에 들었다.

이 무대는 또 창작 오페라의 대명사로 인식된 ‘시집 가는 날’처럼 친숙한 한국적 선율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현대 음악 어법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천편일률적 오페라 무대의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또 역사적 합의가 내려진 인물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여전히 쟁점을 던지고 있는 인물을 예술적으로 평가한다는 점 역시 신선한 충격이다.

1회 공연에 12명의 스타급 성악가를 비롯해 50명의 합창단, 20명의 무용단 등이 함께 출연하는 대작이라는 점도 침체해 가는 여름 오페라 무대의 희소식이다. 박정희(박치원ㆍ김남두), 육영수(김희정ㆍ이지은), 육종관(백광훈ㆍ변병철) 등 연기량이 많은 배역은 더블 캐스팅이다.


육영수의 죽음까지 총 3막

오페라는 1950년 늦가을 대지주 육종관의 아흔 아홉 칸 저택에 양식을 꾸러 온 마을 사람들과 육종관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서 출발한다. 이어 조국근대화의 이름으로 벌어진 건설 사업의 현장담인 ‘우리도 할 수 있다’, 미국과의 갈등 등 근대화 과정에서 박정희가 겪은 사건들에서 육영수의 죽음까지 모두 3막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매일 오후 6시부터 3시간 동안 연습실인 신사중학교 강당에서 후배들과 땀을 흘리고 있는 박정희역의 테너 박치원(58)은 “대학시절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 등 박 정권에 반대했던 내가 그 핵심 인물로 분하다니 아이러니”라며 “친구들이 왜 그 역을 맡았냐며 따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습이 계속 되면서 이 오페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즉 완전한 현대 음악이어서 프로 음악가인 자신에게도 낯설었지만 연습을 해가면서 이제는 신선한 감동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을 면해보려 고뇌하는 박정희의 내면적 고뇌가 현대 음악적 어법과 잘 맞는다”며 호감을 표한다. 특히 3막에서 박 대통령이 미국대사와 포항제철 건설 문제와 새마을 운동을 두고 실랑이를 벌일 때 입씨름 벌이는 대목은 현대 음악의 맛이 잘 드러나 있다고 것이다.

낯선 현대 음악의 묘미가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제 2막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합창이다. “가난과 부패에 갇힌 조국이여/우리가 걸어 가네 억압의 벽으로” 같은 가사는 지난날 한국인들의 집단 무의식을 지배해 왔던 실체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밝혀준다.


정주영 박태준 등 근대화 주역들 등장

현장 인부들 사이를 누비는 사람이 정주영이다. 그는 인부들에게 막걸리를 건네며 “이렇게 해서라도 공사를 하지 않으면/우리는 영영 가난을 못 벗어나게 돼”라며 독려한다. 현존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이 오페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5ㆍ16 동지로 나오는 박태준이 박정희에게 보내는 찬양이 좋은 예이다. “용광로의 불길을 보십시오/당신은 초인입니다”

순수 창작 오페라는 제작자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위험 부담이 크다. 날로 늘어가는 뮤지컬 등 인접 장르의 무대 예술에 밀려나 갈수록 입지가 줄어드는 오페라 무대가 순수 창작물을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만도 이 무대는 호평을 받고 있다.

국내의 창작 오페라 작품은 ‘시집 가는 날’, ‘원효‘, ‘이순신’, ‘춘향전’ 등 알려진 작품의 재상연에만 주력하는 실정이다. 뉴 서울 오페라단 대표 홍지원씨는 “현실적으로 힘든 국내 오페라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참여한 원작자 이인화 교수(이화여대 국문과)와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인 작곡가 백병동씨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의 대본료와 작곡료는 모두 1억이다.


박정희는 불행한 남편이었다

홍씨는 “국내 오페라가 세계 무대에 진출하려면 외국 작품 공연은 그만 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현대 오페라로 그려내는 길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작곡가 백씨는 박 정권 당시 억압적 상황을 빗댄 오페라 ‘대사 더듬기’를 써 요주의 인물로 찍힌 적도 있었다. 희비애락의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작곡자 특유의 현대음악적 기법은 과거를 선입견 없이 되돌아 보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대본을 완성하는 데 석 달이 걸렸다는 이 교수는 “박정희는 결국 한 아내의 지아비로서 불행한 남편이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 포스코, 한국마사회 등의 협찬을 받아 모두 7억원의 제작비가로 투입됐다. 후반부 무대에 레이저로 투영되는 육영수 입체 초상을 실현하는 데는 6,500만원이 들었다. 3D 영상은 천둥과 번개 등 자연 현상에서 5ㆍ16 등 역사적 사건들을 재현하는 데도 동원된다.

또 1950년대 한국을 무대화하기 위해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한복이 등장한다.

“눈물 많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노라던/내 가슴의 불꽃 조국을 태우고/나 자신마저도 태우고 말지라도/항상 내 곁에 있길 원했던 별이여.” 아내 육영수를 장의차로 떠나 보내는 박정희의 탄식이 처절하다.

박정희역을 맡은 박치원은 격정적인 드라마틱 테너인 데 비해 김남두는 서정적인 리리코 스핀토 테너이다. 어느 쪽이 실제 박정희와 더 비슷할까. 이번 무대는 평소 낯선 음악으로만 치부해 두기 십상이었던 현대음악이 일상의 한국어와 어떻게 조화될 것인지 지켜보는 재미가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8월 8~11일 세종문화회관대강당

장병욱 기자

입력시간 2002/08/12 11:43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