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에 포위된 덕수궁

러 대사관신축 이어 美 대사관 건축 강행, 수난의 역사 연상

구한말 열강의 각축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 서울 중구 정동 5-1 덕수궁(사적 제 124호)을 둘러 싸고 재현되고 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덕수궁 인근 구 경기여고부지에 미국 대사관 아파트 건축을 강행할 계획인 반면 시민 단체들은 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7월 26일 “대사관 건물 신축 및 직원용 아파트 건립 계획을 강행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대사관측은 “현실적으로 대체 부지 마련이 어려운 만큼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반면 녹색연합 등 시민 단체들은 ‘미국이 우리 궁궐 내에 자국의 이익을 위한 건물을 지으려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 아파트 부지는 옛 덕수궁터

미국 대사관은 2002년 6월 덕수궁과 인접한 대사관저 부지에 지상 8층짜리 직원용 아파트(총 54가구 규모)와 지상 4층 규모의 군인 숙소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대사관측은 이와 함께 옛 경기여고 자리에는 지상 15층ㆍ지하 1층짜리 대사관 건물 신축 하겠다고 밝혔다. 대사관측의 이 같은 계획은 1984년 서울시와 미국간에 체결된 구 경기여고부지와 을지로 미국 문화원 부지 간의 재산 교환 협정에 따른 것이다.

당시 협정에는 또 ‘미국 소유 부지인 구 경기여고부지(중구 정동 1-8번지 등)는 사적 제123호 덕수궁 및 제 253호 구 러시아 공사관 주변으로 서울시가 정한 문화재 건축 처리 기준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미국 대사관의 아파트 건립 부지가 옛 덕수궁 터라는 점이다. 때문에 지하에 유물이나 유적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초까지 조선조 역대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선원전(善願殿) 터 등 미발굴 문화재가 묻혀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 단체들은 건물이 들어서는 지점이 문화유적지 주변이 아니라 내부라는 점과 문화재 지역내 건축시 앙각 27도 제한 등 문화재법상 문화재 주변 건축 처리 기준의 규정을 들어 대사관 아파트 건축에 반대하고 있다.

문화재 구역 끝 자락에서 신축 건물의 꼭대기를 올려 봤을 때 그 각도가 27도 를 넘지 못 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덕수궁 바로 곁에 신축 건물을 지으려는 미국측의 처사는 위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더욱이 아파트 건립 예정지는 선원전을 비롯해 혜성당(惠成堂), 흥덕전(興德殿), 의효전(懿孝殿) 등 6채의 전당과 영성문(永成門), 순례문(順禮門) 등이 있던 자리이다.


이명박 시장 미 옹호입장으로 새 국면

그런데 양측의 대립은 이명박 서울 시장이 미국을 옹호하는 등 기존의 입장을 바꾸면서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이 시장은 7월 30일 기자 간담회 자청, “ 미국 대사관 아파트 건립 문제는 관련 법규에 의거해 바라 봐야 한다”며 “단순히 미국이니 안 된다는 식의 국민 감정으로 풀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대사관 아파트 건립 문제는 단순한 민족 감정으로 풀 일이 아니다”며 “대체 부지 문제는 미국측이 먼저 원한다고 해야 협의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이 시장은 또 ‘정동 지역에 문화재가 많은 만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러시아 대사관도 문을 열지 않았느냐”며 적극적으로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덕수궁터 미 대사관ㆍ아파트 신축 반대를 위한 시민 모임’은 “서울 시장의 미온적 태도는 결국 책임 회피”라고 비난하고 있다. 시민 단체들은 “서울시와 정부는 옛 덕수궁터를 재매입하고 덕수궁을 비롯한 정동 일대를 문화지구로 지정해 특별 관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 단체들은 덕수궁과 정동교회의 이미지를 잠식한 러시아 대사관을 선례로 지적하고 있다


덕수궁 짓 누르는 러대사관 건물 구조

7월 27일 개관한 새 러시아 대사관 건물은 정동 일대의 스카이 라인을 바꾸게 하는 등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0년 1월 시공해 2001년 사용 승인을 받아 1년간 내장 공사를 마친 이 건물은 지상 12층, 지하 1층(연건평 2,402평)의 직원 숙소와 지상 6층의 사무동으로 옛 배재학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 대사관 신축은 1997년 체결된 ‘러시아에 있는 한국 대사관 부지와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 부지 교환 장기 임대에 의거하여 양국간의 대사관 부지를 99년간 상호 장기 임대한다’는 협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물 규모에 비해 작은 창문과 직선적인 건물 배치 등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못하는 폐쇄적인 구조에다 국내 최고의 교회 건축물로 꼽히는 정동 제일 감리 교회 서편에 자리잡고 있어 덕수궁을 압도하는 듯한 구조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미국 대사관 아파트 반대연대 모임을 이끌고 있는 김정동 목원대 교수는 “구한말 열강의 외교 각축장이었던 정동 지역의 수난사는 새 러시아 대사관의 직선적 외관과 권위적인 배치 때문에 재현되고 있다”며 “이는 미 대사관 아파트 건립이 어떤 식의 경관 파괴를 불러 올 지 미리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말했다.

‘정동 소사(小史)’의 저자이기도 한 김 교수는 “미국은 이 자리를 포기하고 인천 공항과 가까운 한강 변 한적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장병욱기자

입력시간 2002/08/12 15:10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