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꽃 농사꾼, 변용수

꽃으로 도시의 표정을 가꾸는 코디네이터

세상은 넓지만 할 일은 하나다. ‘꽃 농사꾼’ 변용수(47)씨는 25년을 한결같이 거리에 꽃을 심고 가꾸는 일로 삭막한 서울에 색깔을 입혀왔다.

특히 지난 6월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만큼이나 그에게도 치열한 한 달이었다.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광화문 응원 현장에 그도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함께 서 있었다.


월드컵 같은 큰 행사 끝나면 녹초

“1988 서울 올림픽 때도 이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번 월드컵 때는 개막 한달 전부터 상암동 경기장 주변 등에 꽃을 심고 준비한 뒤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특히 우리 경기가 있는 날은 광화문 응원 인파에 화단의 꽃들이 밟힐까 봐 종일 현장에 살다시피 했습니다. 새벽부터 미리 바리케이트를 쳐놓기도 하고, 오후에는 경기가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나가 사람들에게 꽃이 밟히지 않도록 몸으로 막고 서 있었습니다.

왜 화단에 못 들어가게 하냐고 아들 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욕을 듣기도 하고, 인파에 떠밀려 아주 곤욕이었습니다. 새벽 2~3시께 겨우 응원단이 완전히 해산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또 복구작업을 하느라 꼬박 밤을 샜습니다. 다음날 시민들이 망가진 꽃밭을 보면 보기 흉하니까요. 경기 구경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아휴, 지금 심정으로는 월드컵을 두 번 한다면 다시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서울시 공원녹지관리사업소 기능직 공무원으로 서울의 화단과 녹지를 가꾸는 일을 맡고 있다. 시민들에게 가장 낯익을 시청 앞 화단과 안전지대, 광화문 중앙분리대와 안전지대 등에도 그의 땀이 배어있다.

화단 등에 심어있는 꽃과 잔디도 직원 30여명과 함께 경기도 고양의 덕은양묘장(養苗場)에서 직접 가꾼 것들이다. 월드컵과 같은 ‘비상사태’만 아니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양묘장에서 보낸다.

서울에서 꽃을 가꾸는 공무원으로는 최고참이자 터줏대감이다. 이곳에서 연간 출하하는 꽃이 약 200만 포기, 종류만 100여 가지. 서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꽃들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하루 평균 3~4만 포기, 1.5톤 트럭 8대분의 꽃을 끊임없이 실어 나른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집과 양묘장을 왕복하듯 살았다. 새벽에 출근, 저녁 때까지 양묘장을 20바퀴쯤 돌았다 싶으면 하루가 저문다. 그의 꽃 농사에는 겨울 농한기도 없다.

제일 먼저 얼굴을 내미는 2월의 팬지로부터 시작해 11월 꽃양배추까지 말끔히 마무리를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이듬해 봄 꽃 준비로 겨울이 짧다. 보는 시민들에게는 그저 잠깐의 시선으로 지나칠, 그 짧은 한 순간을 위해 변씨는 사시사철 꽃을 매만진다. 보다 탐스럽고 예쁜 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변씨의 욕심이다.


자식농사처럼 마음 닿아야

“꽃 농사도 자식 농사처럼 마음이 닿아야 합니다. 사람도 김씨, 박씨 다르듯이 꽃도 꽃마다 성격이 제 각각입니다. 그 성격을 얼마나 잘 알고 잘 들어주는가가 꽃을 잘 키우는 비결이지요. 같은 꽃이면서도 물을 많이 줘야 좋아하는 놈, 물을 많이 주면 싫어하는 놈, 많이 주든 적게 주든 다 괜찮다고 하는 놈, 물보다는 비료를 많이 달라고 하는 놈 등 천차만별입니다.

국화 한가지만 해도 50개 종류 하나 하나가 다 개성이 다릅니다. 사흘동안 물을 안 줘도 사는 ‘산간지월’이란 놈은 잎이 얼마나 뻣뻣한지 그냥 잎을 세우려고 했다가는 그대로 부러져버립니다. 그래서 이 놈은 펜치에다 붕대를 감아 안마를 해주듯이 잘근잘근 잎을 씹어줘야 겨우 말을 듣습니다. 꽃을 키우는 데는 대단한 노력 없이는 안됩니다. 최소한 10년은 키워봐야 꽃이랑 조금 말이 통합니다.”

변씨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 농사 짓는 부모님 아래 자라면서 어려서 부터 꽃과 흙에 친숙했다. 농업고등학교에서 원예학을 공부했고, 그 중에서도 국화가 전공이었다.

요즘도 응암동 자신의 집에서 국화 약 30포기를 키우고 있어 이웃들이 즐겨 구경을 올 만큼 각별한 사랑이다. 졸업 후 한 국화 농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 평생 꽃을 가꾸며 살고 싶었던 그가 마침내 원하던 일을 만난 것은 1978년 공원녹지관리사업소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

공무원이지만 양복이 아니라 작업복을 입고 종일 흙과 더불어 땀을 흘리는 일이었다. 당시 양묘장은 뚝섬에 있었다. 근무하는 직원은 그를 포함해 단 세 명. 꽃도 10종류가 전부였다.

그러나 처음 보는 꽃들이 많은데다, 파종 시기며 제초방법 등 몇 줄의 꽃 소개가 전부인 책만으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부닥쳐 한동안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근무 때와 퇴근 후를 가리지않고 공부하기를 거듭,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각 꽃들의 특성과 재배의 노하우가 잡히기 시작했다.

한강개발사업이 펼쳐지면서 뚝섬에 있던 양묘장은 상암동을 거쳐 1997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그 동안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열린 크고 작은 행사들 뒤에는 그와 그의 꽃들도 소리없이 역사의 현장을 함께 하고 있었다.

세계의 선량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던 1983년 국제의원연맹(IPU) 총회는 그에게 닥친 첫 ‘비상사태’였다. 손님맞이 꽃 단장을 위해 김포공항, 양화교 일대 등 곳곳에 꽃 탑이 세워졌고, 이를 위해 변씨는 동료들과 함께 거리에서 꼬박 밤을 새며 꽃 탑을 만들었다. 높이 10m의 대형탑 철제 골조에 1만여 개의 꽃 화분을 야간에만 일일이 끼워 넣는 작업이었다.

요즘처럼 자동급수시설도 없어 가는 곳마다 일일이 급수차를 동원해 꽃들에게 물을 주었다. 잠실의 올림픽 주경기장 개장 때 주변 꽃 길을 조성하느라 수십 명이 며칠씩 비지땀을 흘렸다.

그 후에도 국가의 중대사 때마다 빼놓지않고 행사장 주변을 꽃으로 장식해왔지만, 두 달 전에 있었던 월드컵에 비하면 지난 날의 고생은 오히려 양반이었다. 한국축구사상 최초의 4강 진출의 신화 이면에는 선수들만큼이나 자랑스런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 한 이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궂은날이면 아예 양묘장서 숙식

꽃들의 사고도 많았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철, 장마나 태풍, 집중호우는 꽃들의 천적이다. 국화류는 단 서너 시간만 물에 잠겨도 죽어버린다. 1984년 9월, 강원도에 하루동안 약 400mm의 엄청난 폭우가 퍼부었던 그날, 양묘장도 발칵 뒤집혔다.

슬라브 2층 건물 중 1층 창고도 물에 완전히 잠기면서 출하를 목전에 두고 있던 가을 꽃들이 전량 몰살당했다. 지금도 태풍 소식만 들리면 변씨의 가슴은 조마조마하다. 겨울 한파도 못지않게 위협적이다.

지난해 만해도 폭설로 비닐하우스 7개 동이 무너져내렸다. 다행히 붕괴 중에도 비닐하우스의 철제 지주대의 도움으로 꽃의 피해가 적었지만, 여름이든 겨울이든 꽃 농사꾼들의 마음은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1년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다.

시내에 꽃 교체작업을 나갔다가 자신의 마음을 다치고 들어오는 일도 있다. 지나는 시민들이 ‘멀쩡한 꽃을 갈아치운다’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을 때가 있다. 마구잡이 예산 낭비로 보는 것이다.

“그 자리에선 차마 전후 사정을 일일이 이야기 할 수도 없어 그냥 조용히 상황을 넘기지만, 속으로는 좀 서운해집니다. 우리의 고생은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도, 왜 이런 욕까지 들어야 되나…. 그건 일부러 예산을 쓰려고 꽃을 바꾸는 게 아니거든요.

시민들이 보시기엔 일단 꽃이 말짱하니까 괜찮은 줄 아시지만, 저희들이 보면 이미 갈아줘야 할 때가 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심은 지 두 달이 지나면 그사이 키가 많이 커서 조금만 비가 와도 쓰러지게 됩니다.

또 키 높이 때문에 줄기 사이도 엉성하게 떠서 점점 모양이 망가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꽃만 생각하다 보니 오해를 하는 거지요. 사실 비용을 생각하면 꽃 자체부터가 꼭 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화단을 한번 바꾸는 데 인건비까지 합쳐 가령 1,000여 만원이 들어간다 치더라도 시민들이 길을 지나면서, 또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 꽃들을 보고 마음의 휴식과 위안을 받은 분들이 있다면, 돈 보다 몇 곱절 많은 수천,수 억원의 값어치를 하는 게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보람으로 저도 이 일을 하는 거지요.”


꽃은 내게 만병통치약 같은 것

초창기엔 명절도 없이 일했다. 일요일에 쉴 수 있게 된 것도 몇 년 전부터다. 휴일이나 퇴근 후에도 비닐하우스의 온풍기나 보일러가 조금이라도 고장이 나면 양묘장으로 달려 나온다.

겨울철 밤새 눈이 내리는 날은 아예 양묘장에서 밤을 지샌다.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간단한 삶, 변씨에게는 가끔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꽃을 만지고 있으면 아무 잡념도 없고, 마음이 아주 편안합니다. 한참 열심히 일하고 난 뒤 땀이 흐를 때 기분이 좋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엊그제 팬지를 심었는가 싶은데 금새 여름이 되고, 가을이 옵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다 보면 정년도 금새 찾아와있겠지요.”

변씨는 요즘도 꽃 공부를 멈추지 않고 있다. 틈 날 때마다 개인 농원을 찾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재배법을 배우거나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주기도 하고, 안면도 꽃 박람회 같은 관련 행사도 빼놓지 않고 찾아본다.

새로운 종자가 나온 것은 없는지 수시로 종묘회사에 전화를 걸어 최신 정보를 살피기도 하고, 새로 나온 종자는 씨앗을 얻어다 키워보기도 한다. 시민들은 최근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변씨의 공부거리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가로의 꽃 화분에 자연스레 시선이 멈춘다.

물을 제대로 주지 않아 마르거나 상한 꽃을 보면 이따금은 이를 관리하는 담당자를 찾아 조심스레 조언을 전하기도 한다.

변씨의 이야기는 얼추 끝이 났다. 다시 모자를 눌러쓴 채 변씨는 비닐하우스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바깥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다시 구릿빛 얼굴에 땀이 맺혔지만, 덥거나 말거나 그 사이 인기척을 기다리며 보채고 있을 꽃들을 향해 그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8/1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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