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쟈니 브라더스(上)

‘쟈니 부라더스’는 남성 4중창단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던 1960년대의 슈퍼스타였다.

최초의 남성보컬그룹 ‘블루벨즈’와 ‘멜로톤 쿼텟’에 이어 3번 째로 탄생한 대학생보컬그룹 ‘쟈니 부라더스’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4성 화음뿐만 아니라 무용수 뺨치는 율동까지 곁들인 무대매너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동과 더불어 월남파병으로 온 나라가 희망과 우울함이 뒤섞인 1960년대 초. 그들은 도회풍의 밝은 노랫말을 스탠더드 팝 계열의 경쾌한 가락에 얹어 대중들에게 위안을 안겨 주었다.

이들의 국민가요 급 히트곡인 ‘빨간 마후라’는 단순한 행진곡풍 노래가 아닌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가락으로 메가톤급 사랑을 받았다.

1962년 데뷔이래 40여 년 동안 외곬 음악인생을 걷고 있는 창립멤버 김준은 가요계의 신사로 후배 가수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본명이 김산현(金山鉉)인 그는 1940년 1월14일 만석꾼이었던 부친 김득수와 모친 최창선의 1남1녀 중 3대 독자로 평안북도 신의주 마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김준은 또래 아이들은 상상하기 힘든 당꼬 바지에 소가죽 구두를 신고 장난감 칼과 진짜 기상나팔을 부르며 동네를 주름잡았던 골목대장이었다.

음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집안이었지만 부친은 노래 잘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 했다. 동요를 잘 불렀던 그는 유치원 때 5개 국어로 노래하는 프로에 소련어로 노래를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7살 무렵 토지개혁으로 집안의 재산을 몰수당하자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해 1년간 다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광산촌의 주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부친은 한때 강원도 일원에서 꽤나 알아주던 ‘달별표 비누’공장을 세워 사업을 일으켰다.

이미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던 김준은 6ㆍ25가 터져 인민군이 들이 닥쳤을 때 행사가 있으면 불려가 인민군 노래를 강제로 불렀다. 1ㆍ4후퇴 때 목포를 거쳐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대전부락 향교에서 어렵게 살던 중 어머니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자 토끼부락으로 옮겨 구멍가게를 차렸다.

고단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가곡으로 도내 음악 콩쿠르를 휩쓸었던 그는 아침조회시간에 교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제주 대정고교의 유명한 노래꾼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한동안 인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미군교회의 흑인목사 채플린 게이를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도 배우고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마할리아 잭슨의 재즈와 흑인영가를 접했다.

고교 졸업 후 경희대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 중고 음악 콩쿠르’ 성악부에 3등으로 입상을 하며 경희대 음대에 60학번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김준은 “고백할 것이 있다”며 어려운 말문을 열었다.

김준은 “이미 졸업하고 쉴 때 대정고의 정남혁 음악선생이 학교 대표로 콩쿠르에 내 보낼 학생이 마땅치 않자 나를 찾아와 다시 머리를 깎게 해 고등학생으로 만들어 콩쿠르를 참가시켰다”며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미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 고교동기 장철우 목사가 소개한 교회 음악선생 이동일의 도움으로 입상을 했다. 이후 용산 수도여고 건너편 캠프 코이너 채플의 시온 성가대 합창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잡무를 도와주며 숙식을 해결하고 악보를 익혔다. 이 시절은 그의 음악적 기초와 인성을 정립해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1학년 수료를 하고 2학년 올라갈 때 장학제도가 없어지자 직업이 필요해 김종필이 단장이었던 예그린악단 합창단원모집에 응시해 들어갔다. 김준은 “이때 처음으로 하루 세끼를 먹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예그린 시절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해 좋았다.

또한 멜로톤 트리오 멤버 중 한 명이 군에 입대해 임시멤버로 영입되어 시민회관무대에 서기도 했다. 1년 후 예그린 악단이 해체하자 김산현은 김준으로 예명을 만들어 평소 배짱이 맞았던 동료단원 진성만, 김현진, 양영일과 보컬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브라더스 포, 에임스 브라더스 등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콰이어강의 휘파람’을 부른 ‘미치 밀러 합창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포크 싱어 전석환은 연습실을 빌려주고 하몬드 올갠을 쳐주며 이들을 지도해 준 은인이었다. 1962년 율동을 겸해서 노래 연습을 해 새롭게 개국한 동아방송 노래자랑 연말결선에 올라 최고상을 받 으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룹 이름이 없던 이들은 전석환의 별명 ‘쟈니’를 따 ‘쟈니 부라더스’로 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8/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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