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CF·방송 음향효과의 대부 김벌레

천상 천하의 음을 만드는 소리의 마술사

효과음향계의 대부 김벌레(61)는 삼복 더위를 느낄 겨를이 없다. 압구정동에 있는 자신의 녹음실 ‘38 스튜디오’에서 음향 기기에 둘러 쌓여 하루 종일 음향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첫 저서가 될 ‘사운드 예술의 이해와 실제’의 출간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바쁘다. 두툼한 교정쇄 뭉치를 끼고 산다. 흡사 대학 교재를 연상케 하는 딱딱한 제목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 같은 격식이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40년을 고스란히 현장에서 소리 탐구에 바친 그에게 풍부한 현장 경륜이 곧 학문이다. 그는 제목 바로 뒤 작은 활자체로 ‘이 소리 들어 봤습니까?’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다.

‘Tl qkf…’마치 암호 같은 알파벳 문자는 사실 한국어다. 컴퓨터 자판을 한국어로 해 놓고 영문자대로 쳐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욕이다. 그가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잘 알고 지내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그냥 한국어로 써 버려”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자신의 경험이 짙게 배인 독특한 음향 기술론 ‘사운드 예술의 이해와 실제’는 8월 말 백산서당에서 발행된다.

광고 음향이란 개념 조차 없던 1970~1980년대 전파를 통해 들린 기발한 효과음은 99%가 그의 것이었다. 100% 기록을 못 채웠던 것은 김도향과 윤형주의 CM 송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고 어김없이 요즘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내가 만들었던 광고 음향이 20,000여 편은 돼요.”


콜라병 따는 소리는 콘돔 터지는 소리

펩시 콜라 병을 따면 터져 나오는 ‘뻥’ 소리는 콘돔을 최대한 부풀린 뒤 담뱃불로 지져 내는 소리였다. 당시 풍선의 품질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어 찾아 낸 대체물이 그것이었다. 수백개의 풍선을 거덜 낸 그는 약방을 찾아 다니며 질긴 물건을 찾아 콘돔 수백 통을 구해 한달간 불고 지지고 녹음해서 듣기를 반복했다.

이 소리를 ‘발명’해 낸 대가로 그는 100만원을 받았다. 1960년대 말 시가로 그 액수는 집한 채라는 만만찮은 값이었다. ‘만보사’라는 종합 광고 대행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1969년 중국 영화가 손을 내밀었다. 낚싯대를 허공에 휘둘러 칼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는 등 중 국 영화 특유의 청각 효과들이 바로 그의 손에서 나왔다.

1970년대 중반 금성 TV가 국내 최초로 리모콘이라는 물건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잘 알려달라’며 그에게 갖고 왔다. 이 신기한 기계의 특성을 음향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그는 ‘보이는 소리’를 만들었다.

브라운관을 겨눈 리모콘에서 ‘피슛’ 소리가 나더니 신기하게도 저절로 켜지는 TV 광고였다. 성냥을 그을 때 나는 소리를 응용한 그 효과음은 너무나 강렬해 사람들에게 생각도 못한 항의로 제조사는 뜻밖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내 리모콘에서는 왜 그런 소리가 안 나느냐’는 것이었다.

브랜닥스 치약을 뽑아 들게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광고에 나오는 여자가 양치 후 입술을 핥으니 상쾌하게 울려 퍼지는 ‘뽀드득’ 소리에는 더 이상의 제품 설명이 필요 없었다. 고무 풍선에 물을 약간 묻힌 뒤 손으로 문질러 나는 소리였다. 당시 만화 영화 ‘로봇 태권 V’에 나오는 모든 소리는 그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방송국 생활 13년이 큰 밑천

그의 기발한 착상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능력은 그때 그때의 순발력이 요구되는 연극판에서 자연스레 길러졌다. 배우를 하고 싶었던 그는 19세이던 1960년 비슷한 꿈을 가졌던 친구들과 함께 극단 ‘행동무대’를 창단하고 꿈을 키워갔다.

이후 그는 극단 미추와 목화 등 자기 개성이 강한 극단과 함께 작업하면서 음향 효과와 연기를 쭉 담당했다. 모두 1941년 생으로 늘 붙어 다녔던 연극인 김상렬, 유경환, 이영식, 그리고 김벌레 등은 유명한 연극 ‘4인방’이었다.

1970년대의 인기 위장약 ‘탈시드’의 시리즈 광고와 해태제과의 광고 등 유머러스한 TV 광고에 그가 직접 출연한 것이 연극으로 기본을 닦은 덕이다.

그가 소리를 조합하고 재현해 내는 기술적 작업을 체득한 것은 방송국 생활 13년 덕이다. 1962년 라디오 방송인 동아방송(DBS) 개국 직원으로 시작했던 그는 ‘특별 수사 본부’, ‘이 사람들’ 등 인기 프로에서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파도소리를 만들어 내는 특수 문짝, 신비한 소리를 만드는 물통 등 당시 그의 머리에서 나온 음향 아이디어는 언제나 상식을 앞질렀다.

1975년 방송국을 그만 둔 그는 서울예전 광고창작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홍익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로 있다. 풍부한 실전 경험과 연극 판에서 닦은 기량으로 수업 시간은 언제나 웃음판이다. ‘38 스튜디오’란 이름 역시 그의 유머다.

아무리 시원찮은 따라지 같은 작품이라도 ‘광(光)땡’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 방송국을 떠난 1975년 경기 고양군 신도면에 만든 그의 스튜디 오는 이후 1980년 화곡동을 거쳐 1990년 현 위치에 정착했다.

생활이 안정되자 3년 뒤에는 영상과 음향을 결합한 비디오물 ‘한국 소리 100년’이 탄생했다. 구한말에서 마라톤 영웅 황영조까지 격동의 세월을 소리라는 주제로 묶은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을 수상해 한국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홍보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한다.

노동요, 다듬이 소리, 풀벌레 소리 등 이제는 실생활에서 사라져 버린 소리 1,000여 가지는 그가 일일이 채집한 것들이다.


정치풍자 단막희곡 쓰는 재미에 ‘폭’

요즘 그는 팔자에 없는 글쓰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한국의 정치판을 풍자하는 단막 희곡 ‘우리 대통령(代統領)’이 그것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큰 대(大)자가 아니라 대신할 대(代)자를 썼다. 1998년 쓰다 만 이 정치 풍자극은 요즘 들어 점점 더 현실을 닮아 간다는 생각이다.

“월드컵 구경 와 놓고 셋이서 서로 아는 체도 않으니 세계에 망신살이 뻗친 거죠.”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국회 연설 기록 등 자료를 뒤져 보니 치매도 아닌데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며 발뺌 하는 모습들이 더 이상 희극적일 수 없다. 연극은 도둑 둘이서 일인 다역으로 수많은 정객들을 연기한다. 누구를 연기하는 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수 있다.

그는 “국내 공연이 힘 들면 외국서라도 먼저 하고 들어 올 것”이라며 “이제는 태극기로 속옷을 해 입는 세상이니 안 될 것 없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는 복이 많은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3대가 함께 자택 겸 작업실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 스튜디오에서 산다는 사실 때문이다. 보행기를 짚고 다니는 아버지 김재덕(85) 옹을 곁에서 수발할 수 있어 늘 감사한다.

아들 태근(32)은 자신과 같은 음향 기술자여서 아예 동지다. 태근은 2002 한일 월드컵 개막 행사에서는 태근이 음향 효과를 총괄했다.


쉽게, 대중적으로, 한국적인…철학

그는 음 현상에 몰두해 있던 청년 시절 읽었던 ‘증보문헌비고’를 종종 펼쳐 본다. 세상의 소리는 쇠(金), 돌(石), 실(絲), 대나무(竹), 바가지(匏), 흙(土), 가죽(革), 나무(木) 등 8가지 재료로 이뤄져 있다는 옛 이론이다. 내던져 두었던 기본을 다시 따라 가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고전을 다시 펼쳐 든다.

독특한 이름은 물론 별명이다. 그의 교수 명함에는 ‘평호(平鎬)’라는 본명이 명시돼 있다. 벌레라는 이름은 연극 수업기에 왜소한 신체에 재기 넘치던 그를 본 이해랑과 유치진이 장난 삼아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러다 동아방송(DBS)에서 일하면서 부터는 스로가 그렇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화 받을 때면 우선 “신나는 김벌랩니다”라고 말하고 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 말 들으면 상대편이 기분 좋아 하잖아요. 내가 생활의 소리를 조합해 작품으로 내 놓는 이유도 그런 거죠.”

그의 철학은 ‘가장 쉽게, 가장 대중적으로, 가장 한국적으로’ 이다. 그는 “쉬워야 빨리 들어 오는 법”이라고 말했다.

장병욱 기자

입력시간 2002/08/12 17:22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