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기상천외한 골드러시

금괴 밀수 급증… 수법 갈수록 고도·지능화

7월29일 오후 2시20분 인천공항 화물터미널. ‘대한주강’이라는 국내 한 수입업체 소속의 40대 중반 남자 2명이 홍콩에서 자신들이 수입한 유압펌프 16개에 대한 통관심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통관서류를 들여 다 본 배인곤 (48)인천공항세관 조사총괄과 조사2계 반장은 ‘에어하이드로(유압)펌프’로 명기된 수입 품목명을 보고 물품확인을 위해 수입물품 박스 중 한 개를 골라 뜯기 시작했다. 가로20㎝ㆍ세로15㎝ㆍ높이30㎝의 박스를 열자 자동차를 들어올린 때 사용하는 차량공구 리프트 형태와 유사한 유압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 반장은 며칠 전 홍콩을 거쳐 입국한 국내 한 경호업체 사장이 유압전동공구 속에 금괴를 숨겨 여객청사를 빠져 나오려다 적발된 금괴밀수 사건을 불현듯 기억해 내고, 조심스레 물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압펌프의 밑부분 케이스는 10개의 볼트로 꽉 조여져 있었고 겉으로 보기엔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케이스 자체가 상당한 무게인 듯 중량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케이스 볼트를 풀고 뚜껑을 벗기자 그 안에는 비닐 충진제가 꽉 채워져 있었고 그 밑으로 골판지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골판지를 조심스럽게 벗겨본 배 반장은 곧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골판지 사이로 반짝이는 금 덩어리의 반사광이 두 눈으로 가득 들어왔다.

‘노랭이(세관원들이 금괴를 일컫는 명칭) 다’고 배 반장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1㎏짜리 금괴 2개가 1조를 이뤄 케이스 속에 5줄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담뱃갑 크기보다 작은 1㎏ 금괴의 시중가격은 1,300만원 대로 웬만한 소형 자동차 가격을 웃도는 수준이다.

범행 수법이나 규모로 보아 조직적인 밀수 조직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직감한 배 반장은 현장에서 즉시 이를 적발하지 않고 본부측에 연락, 이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 돈의동 낙원상가 주변에 위치한 이들의 아지트를 급습한 세관 직원들은 현장에서 밀수자금으로 보이는 현금 17억원을 압수하고 이들의 배후 조직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던 소위 ‘노랭이(금괴)’ 밀수가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촉발과 달러화 가치하락세의 틈을 타고 올들어 급증하고 있다. 올 1~7월말까지 금괴 밀수적발 규모는 금액기준으로 188억4,500만원 수준으로 지난해 1년간 적발된 총 금괴밀수 규모인 36억9,800만원 상당에 비해 무려 410.5%나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밀수조직과의 연계에 수사

관세청은 최근 인천공항 등 주요 세관을 중심으로 금괴밀수 특별조사반을 구성하는 한편 국내 활동중인 금괴밀수 조직에 대한 현황파악과 함께 이번에 적발된 국내 밀수 범들에 대한 검찰 고발을 통해 홍콩 일본 대만 등 국제 금괴판매조직의 연계여부에 대한 수사협조를 요청하는 등 일명 ‘노랭이’ 비상에 나섰다.

금 수입판매가 자유화되고 변동환율제 도입 등으로 금에 대한 투자가치가 상실되면서 금괴밀수는 거의 자취를 감춰 1998년에는 1건도 적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99년 2,900만원 상당(2건)이 적발됐으며, 2000년 8억1,800만원 상당(12건) 등으로 서서히 늘어나면서 올들어 금괴밀수가 다시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인천공항세관은 최근 서울에 유령회사를 설립, 홍콩에서 유압펌프를 수입한다고 세관에 허위로 신고 한 뒤 그 속에 금괴를 숨겨 들여오는 수법으로 7월18~29일 33차례에 걸쳐 금괴 660㎏(시가 86억원 상당)을 밀수입한 금은방 주인 정모(44)씨와 중간 거래상 정모(48)씨를 구속했다.

단일 밀수 건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이 사건은 이들이 홍콩 현지조직책과 짜고 특송 업체를 통해 금괴를 항공화물로 보내게 한 뒤 인천공항화물터미널에서 금괴를 찾아 서울 종로3가 등 시내 금은방 등에 판매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또 7월26일 유압식 전동공구 안에 1㎏짜리 금괴 30개(시가 4억원 상당)를 숨겨 이를 휴대용 가방에 넣어 들여오려던 국내 한 경호업체 대표 김모(46)씨가 공항세관에 적발됐다. 김 씨는 최근 2개월간 20여 차례나 홍콩을 빈번히 드나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5월 16일 국내 S수입업체가 5월16일 금괴 61㎏(시가 7억5,000만원 상당)을 스테인리스라고 허위로 수입 신고를 한 후 x-레이 투시에 드러나지 않는 점을 악용해 밀수입하려다 덜미가 잡히는 등 금괴밀수 유형도 점차 지능ㆍ고도화되고 있다.


천정부지로 뛰는 금 시세

최근 금괴밀수가 다시 늘고 있는 배경에는 우선 경기회복에 따른 국내 수요량이 늘고 있고 달러화의 약세와 함께 내년 물가불안이 가시화할 것이라는 전망 등으로 선물 투자자들의 금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국제 금 시세는 천정부지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8월8일 현재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12월 물 금값은 전장보다 무려 8.80달러(2.9%) 급등한 온스 당 316.10달러에 마감, 315달러 선을 훌쩍 넘어섰다.

이는 6월22일 이래 최고 치로 1일 상승 폭으로는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런던 금속거래소(LME)에서도 금 현물가는 전날 가격대인 305.50-306.00보다 대폭 오른 313.70-314.20 달러 선에 가격대를 형성했다.

최근 금 시세가 높이 뛰고 있는 데는 세계 유수의 광산 기업들이 올해 말 금 가격 상승반전을 예상하고 금 매입에 나서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시장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등으로 금이 해외로 수출돼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내 수요량이 경기 회복에 따라 크게 늘고 있는데다 달러화 가치약세로 금에 대한 투자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발권국의 한 관계자는 “ ‘유동 자산의 고전’으로 꼽히는 금이 최근 ‘역시 믿을 만한’ 투자처로 다시 부각되면서 시세가 급등하고 있고 내년부터는 보험사 나 선물회사도 펀드발행이 가능해지면서 정부가 펀드의 투자대상을 금과 부동산, 장외파생상품 등으로 확대하는 ‘자산운영법’을 시행할 방침이어서 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7월 말 돈 당 4만8,000원대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귀금속 업체가 몰려있는 서울 종로3가 일대를 중심으로 때아닌 ‘금 쌓기’ 바람이 불고있다.

귀금속 판매 업체인 ‘골드만’의 심형보 사장은 “환란이후 금을 정식 수입하는 무역 업체들이 늘어나는 등 금 수입루트가 양성화 되면서 지난 10년 사이 금괴밀수는 과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다”면서 “그러나 최근 금괴밀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나까마(중개상)들이 관세(3%)와 부과가치세(10%)를 뺀 당장 눈에 보이는 시세차익을 노리기 보단 물가상승 가능성이 높은 올해 말과 내년 국제금값이 더 뛸 것을 고려한 수요자들의 투자 선행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금을 100% 수입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선 국제금값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최근 금괴밀수가 늘어나는 직접적인 원인인 셈이다.


밀수 경로 다양화 추세

금값이 상승세를 타면서 한동안 뜸하던 밀수 조직들이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는 각종 정보들이 최근 관세청에 속속 입수되고 있다. 밀수유형과 수법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각양각색으로 점차 고도ㆍ지능화 되는 추세다.

또 인천국제공항 개항이후 휴대품 검사를 대폭 완화한 점도 금괴 밀수가 늘어나고 있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3월 대만 출신 화교 남자 5명이 특별 제작한 금괴 1㎏ 짜리 1개씩을 양쪽 발바닥에 테이프로 붙인 채 양말을 신는 방법으로 입국하다 적발됐다. 지난해 7월 대만인 보따리상 2명이 자신의 항문 속에 금괴 3.4㎏을 숨겨 들어오다 세관원의 휴대용 금속탐지기에 금속반응이 체크되면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지난해 9월 홍콩 여성이 자신이 들고 들어오던 가방의 손잡이 부분에 막대형 금괴 1.3㎏을, 또 다른 홍콩여성 2명은 카메라 삼각대 빈공간에 금괴 3.6㎏을 숨겨 들어오다 각각 적발됐다.

올 들어 금괴밀수 유형은 한층 정교해지고 있다. 1월 한 아일랜드인은 홍콩을 거쳐 입국하면서 중고 ENG 카메라 배터리 팩 13개에 전극 판 모양 금 절편 10㎏을 밀반입하다 걸렸다. 4월엔 관광객을 위장한 한 크로아티아인이 특수 제작한 조끼에 금괴 1㎏짜리 6개를 은닉해 밀반입하려다 적발됐다.

이밖에도 5월엔 홍콩에서 항공화물 편으로 수입된 워크맨 100개에 배터리 삽입부분에 배터리 크기의 금괴 10㎏(100g짜리 100개ㆍ시가 1억4,000만원 상당)이 발견되기도 했다.

관세청이 적발한 밀수 유형을 살펴보면 ▦소형선박을 이용한 특공대식 밀수(시가 10억6,300만원 상당) ▦품명위장(시가 99억2,000만원 상당) ▦여행자 밀수 (시가 78억6,200만원상당) 등으로 밀수경로가 다양화 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주시경 인천공항 조사총괄과장은 “작년에는 해외 여행자들이 신변 소지품 등에 10㎏이하를 숨겨오는 소규모 밀수가 주류를 이뤘으나 올 상반기에는 50∼70㎏규모로 커지고 있다”며 “최근에는 86억원 상당의 국내 최대규모의 금괴밀수가 적발되는 등 밀수방법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종도=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08/16 14:48


영종도=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