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왜 우리역사에 삽질하려 하는가

미국 대사관 아파트 예정지역은 덕수궁터, 정부 태도가 더 황당

지금 미국대사관 측은 '정동동역'(貞洞洞域)에 대사관 건물과 아파트 짓는 일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그동안 우리 시민모임에서 그 위치에 그런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 전(8월 5일) 우리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서인지 정부 관계기관 책임자 회의를 하며 잘되는(?) 방향으로 해 주려는 수순까지 밝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국무조정실 주재로 외교통상부, 건설교통부, 문화관광부, 서울시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옛 덕수궁 터에 미대사관 건립관련 비공식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관계자들은 옛 덕수궁 터에 미대사관 및 아파트 건립을 위한 매장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키로 하고, 아울러 대사관 시설 건립이 지연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계부처간 적극 협조키로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지는 문화재 발굴 전문가들이 그 터의 발굴에 비협조적이니 우리 관에서 적극 나서 주도적으로 해 주자는 것이다. 이런 친절이 도대체 어디에 또 있는가. 이미 법을 집행하는 대상기관 중 알아서 말을 바꾸고 있는 곳도 있다.

그동안 시민모임을 하며 유감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미국 측도 우리측도 우리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반대하는 소리를 반미로만 몰고 가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몇몇 언론의 경우도 이 점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반대 의견은 장래 미국을 위한 일이 될 것이며 또한 우리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이므로 당사자들은 우리의 의견에 귀기울여 줄 것을 간곡히 바라는 것이다. 미국대사관과 관저 아파트 신축문제는 역사에서 결코 가볍게 기록될 단순한 집짓기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터 내준 정부 큰 실책

일의 단추를 누가 먼저 잘 못 끼었는가를 말하는 것은 논쟁의 시작일 뿐이나 간단히 몇 가지만 거론하고 넘어 가겠다.

문제는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사가며 미국 측에 이 땅을 대토해 준 것으로부터였다. 물론 당시 미국대사관 측이 요구했던 것은 한국일보 맞은 편 송현동(松峴洞) 땅이었다. 그런데 이곳도 문제였다. 이곳은 순종의 장인이었던 윤덕영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경복궁과 종친부와 가까운 경역이었다.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길이라 하여 송현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숲을 가진 곳이었다. 이곳도 일제가 집을 지으며 파괴시켰다. 이곳에 미국 대사관 숙소가 들어간 것은 해방 이후였다.

미국은 사실 이곳을 미국대사관 신축지로 먼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도 청와대와 경복궁이 가 까워 미국에 그냥 내 줄 수 없었다. 따라서 대신 경기여고 터를 넘겨주고만 것이다. 동네 땅 넘어가듯 넘겨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정부의 큰 실책이었다.

그 경기여고 부지가 덕수궁 궁역이었다는 사실과 정동이라는 특수한 동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서적으로 불가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문제는 미국 측이 이번 대사관 신축, 아파트 신축 등 일련의 작업을 비밀리에 한 것이다. 우리 정부와 아무런 교섭도 없었다.

물론 외교 공관이라는 것이 일정한 비밀 사항이 있는 것이라 비밀리에 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는 장소가 문제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토지 사용권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 내 건축가에게 이 작업을 시켰다.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는 이 땅의 역사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설계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건물의 설계가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를 지금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15층 짜리 대사관과 8층 짜리 아파트를 아무리 현 덕수궁과 떨어트려 지어도 그곳은 덕수궁 지역일 뿐이다.

문제된 터들은 모두 과거 덕수궁 궁역이었고 이후 우리 정부에 의해 궁역에서 해제된 적도 없다. 이곳은 일제 시대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1905년 미국은 이곳을 공사관에서 영사관으로 하향 조정하고 대부분 본국으로 철수한다. 1910년부터는 그나마 다시 영사관으로 전락 텅텅 비어진 상태로 미군정 시대까지 갔다.


정동역은 근현대사의 영욕 간직한 곳

덕수궁을 포함한 정동동역은 조선 개국 이후부터 한양의 중심부였고 근현대사의 중추적 장소로서 역할을 하던 곳이다. 현재는 강북지역의 또 하나의 중심으로서 재조명 받고 있다.

특히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곳은 조선조에서 구한말까지 우리 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진 곳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 측은 절차를 위해 지표조사라도 하려 하고 있다. 그 안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 유물도 안 나오리라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아무 유물도 없으면 강행하겠다는 뜻을 은연중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기여고 터(미국대사관 신축 예정지)는 그간 교사를 짓고 운동장을 만들며 대대적으로 훼손시켜 놓았기 때문에 유물이 안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현 미국대사관 내에 있는 부대사 관저 지역은 표면만 '얼핏보기'를 해도 기왓장 등이 나오는 정도이다. 부대사 관저지역은 아파트 예정지이다. 부대사 관저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관저로 지어진 것으로 우리의 등록문화재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물이 나오고 안나오고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정동동역에 대한 역사 기록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 체결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 공사가 이듬해 5월 20일 이곳 덕수궁 땅의 일부를 매입하고 들어왔다. 미국대사관 관저는 원래 덕수궁에 속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여흥(麗興) 민씨(閔氏) 일가의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민씨 가문은 규수 민씨가 고종과 가례를 올리므로 해서 1860년대부터 권세가가 되었다. 덕수궁 지역의 땅들이 민씨가에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민씨가가 힘을 잃자 이 집들은 팔리기 시작했다.

그 중의 몇 채가 미국대사관에 팔린 것이다. 1897년 가을에는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 마당 사이에 담장이 처졌다. 이렇게 해서 미국대사관은 완전히 덕수궁에서 잘려 나간 형상이 되었다. 일제하인 1917년 정동 돌담길이 확장되거나 새로 만들어져 오늘과 같은 구획이 이뤄진 것이다.


美 "내 땅에 짓는데 웬 참견" 오만

미국대사관 측은 우리의 문제 제기에 대해, "자신의 땅에 무슨 건물을 짓든 법적권리행사라는 점에서 하등 문제가 될게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 상징인 미국대사관 관련 건물을 짓겠다 하면서 해당 국가의 전통과 국민적 자존심을 무시하고 단순히 법적 소유권행사라는 자세로 나오는 미국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은 정동의 성격, 덕수궁과의 관계 등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정부는 절대 허가를 내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국 정부는 하루 빨리 이 자리를 덕수궁으로 돌려주고 인천공항과 가까운 한강변 한적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지금 미국대사관 일대는 오늘 우리 덕수궁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다시 복원되어야 할 것이고 정동구으로 다시 자리매김되어야 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지금 해야할 일은 경기여고 터 조사가 아니고 미국대사관을 포함하는 정동동역 조사인 것이다.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입력시간 2002/08/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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