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뛰는 그라운드의 '짱' 김남일

진한 먹구름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린 8월 11일 오후. 광양구장의 관중석 중 가장 인기가 좋은 자리는 단연 전남의 벤치 바로 위쪽이었다. 김남일(25ㆍ전남 드래곤즈)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한 본부석 왼쪽 자리 쟁탈전은 경기 시작 3시간 전인 오후 3시 이미 점화됐다.

이날 전남_대전전을 보기 위해 광양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1만5,936명. 정원 1만5,000명을 넘긴 숫자다. 김남일의 후광은 경기장 밖에서도 감지됐다.

광양구장 외곽에서 핫도그와 닭꼬치 등을 파는 노점상 이상곤(63ㆍ부산 영도구 동삼동)씨는 “7일 취소된 경기 때 왔던 여학생들이 오늘 또 와 이것저것 사먹고 갔다”며 김남일 팬의 주류인 여학생들의 ‘구매력’에 대해 귀띔했다.

김남일의 팬들은 초등학생부터 아줌마 부대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초등학생 정화영(10ㆍ사천초 4)양은 비를 맞으며 벤치 위 난간에 매달린 채 김남일을 기다렸다. 폭우로 경기가 취소된 7일에도 김남일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는 진유현(21ㆍ여ㆍ순천시 연향동)씨는 “솔직함과 과격함의 절묘한 조화가 김남일의 매력”이라며 오빠 자랑을 그칠 줄 몰랐다.

경기 시작 1시간 전인 오후 5시께. ‘옥체보존 김남일’ ‘김남일 짱’ 등의 피킷을 든 팬들의 기다림 속에 김남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팬들에게 처음 선보인 모습은 축구화 끈을 묶는 장면. 새 출발을 뜻하는 의식이었다.

카메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라커룸에서 나온 김남일은 “50일만의 출전이어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적당한 긴장감은 경기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월드컵 수준에 육박하는 취재·응원열기

월드컵이 낳은 최고스타의 복귀전을 취재하기 위해 이날 경기장을 찾은 보도진은 60여명으로 ‘월드컵 수준’에 육박했다.

사설 경호업체의 안전요원은 김남일 근접 경호 3명을 포함, 평소보다 15명 정도 늘어난 40여명에 달했다. 가드탑 경호협회의 정훈 대표는 “김남일의 옷이나 머리카락이라도 한번 만져보려는 극성팬들이 많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경찰의 경계태세도 한층 강화됐다. 광양구장을 관할하는 태금파출소 소장 박명식 경위는 “교통경찰을 포함, 1개 중대 120여명이 오늘 추가 배치됐다”며 “전체적으로 150명이 넘는 경찰이 경기장 내외곽에서 안전사고에 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고의 인기 경품은 진공청소기였다. ‘진공청소기’ 김남일의 사인이 담긴 진공청소기 5개가 이날 관중의 품에 안겼다.

주연배우가 무대에 선 시간은 후반 10분이었다. 6월22일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왼쪽 발목인대를 다친 이후 50일만의 복귀. 김남일의 기량은 오랜 부상 뒤였지만 녹슬지 않았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끈기와 근성은 그대로였다.

김남일의 복귀전은 한양대 96학번 동기동창으로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대전 이관우와의 우정의 맞대결로 펼쳐져 더욱 뜻 깊었다. 둘은 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표 때도 늘 함께 주목 받았던 기대주였다. 플레이메이커 김남일-스트라이커 이관우는 당시 환상의 콤비였다.

지난 해 8월 김남일이 대표팀에 발탁된 뒤 두 선수의 명암은 차츰 엇갈리기 시작했다. 김남일이 월드컵을 거치며 히딩크 사단 최고 스타로 떠오른 반면 이관우는 부상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팬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 잊혀졌던 게 사실.

이관우는 작년 7월 광양 경기서 김남일과의 몸싸움 중 엉켜 넘어지면서 왼쪽 무릎연골이 파열돼 그라운드를 4개월 가까이 떠난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이관우는 김남일이 투입된 후 4분 뒤 그라운드에 나섰다. 김남일은 수비형 미드필더, 이관우는 플레이메이커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직접 마주섰다.

종료 휘슬이 울렸다. 결과는 1-1 무승부. 경기는 끝났지만 ‘에필로그’는 계속됐다. 수백명의 팬들은 김남일이 인터뷰 하는 모습까지 지켜 본 뒤에야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전남 선수를 태운 버스는 구름처럼 몰려든 팬들 사이를 간신히 뚫고 숙소로 향했다. 선수들이 묵는 백운생활관 주위가 잠잠해지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광양=김정호 기자

입력시간 2002/08/16 18:01


광양=김정호 azur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