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판소리의 미래 안숙선

"벽을 허문께 국악이 훨씬 이쁘지라"

8월 14일 워커힐 호텔은 유독 분주했다. 연회장인 가야금홀에서 이틀 계속 열린 ‘8ㆍ15 민족통일대회 환영 공연’ 때문이었다. 박범훈이 지휘하는 국악관현악단에 대금 명인 이생강과 사물놀이의 김덕수가 공동 출연하는 큰 무대였다.

명창 안숙선(53)이 곱게 입은 한복 매무새는 강하게 꽂혀 내리는 핀 조명에 눈부셨고 낭랑한 사설은 김일성 뱃지를 뚫고 동포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기어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흥보가 기가 막혀 아예 복없는 놈은 계란유골이라더니….”

안숙선은 8월 9일 국립극장 야외무대에서 비를 맞으며 공연했다.

“시원하세요. 수궁에 들어 오신 것 같죠. 여러분들이 비 맞으니 나도 비 맞겄습니다.” 간지럽게 날리던 빗방울이 밤 10시가 되자 굵어지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수궁가’를 부르던 안숙선은 빗물이 신호인 양 무대를 내려 와 마당을 가로 질러 객석으로 걸어 갔다.

부채질을 하며 읊는 즉흥 사설에 700여 객석을 가득 채운 귀명창들은 일제히 박수 치며 환호했다. 국립극장이 남해성 이명희 왕기철 등 당대 명창들을 모아 2002년 3월부터 펼쳐오고 있는 ‘2002 완창 판소리’ 무대 가운데 유일하게 야외 심야 공연으로 꾸며졌던 자리였다.

안숙선 특유의 즉흥성과 친화력이 유감 없이 발휘됐던 무대였다. 그것도 퇴원한 후 1주일 만에 공연한 것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직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들과 함께 뉴욕 무대와 베트남에서 열렸던 민속예술제인 ‘후에 페스티벌’에 참여하느라 감기와 기관지염을 얻어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었다.


자기 귀에 반해야 할 수 있는게 소리

안숙선의 날렵한 행보에서는 중요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라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라는 직함도 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가야금을 배우던 9살 아이가 서울에 와서 보다 깊은 국악의 세계를 헤치더니 서양의 음악을 끌어 안기까지의 세월은 곧 국악이 이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할 것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안숙선은 자기 소신이 뚜렷하다. 옳다 또는 꼭 해야겠다고 믿는 바는 행동에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 10년 전에는 목청을 심하게 써 급기야 목에서 피까지 나왔다. 의사는 성대의 모세혈관이 파괴됐으니 한달 동안은 말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틀만 소리 공부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그에게 그것은 징벌보다 더 했다. 조바심에 며칠 뒤 조심스레 소리를 내 보니 조금씩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막 해버렸어요.”

그는 “먼저 자기 귀에 반해야 할 수 있는 게 소리”라고 말했다. 무대 맨 앞에 나와 좌중을 휘어 잡는 소리꾼들은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옛 스승들도 제자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때 넌저시 돌려 말했다”며 자신을 키워 낸 스승들을 떠올렸다.

9살 때 남원 명창 주광덕으로부터 소리와 가야금 등으로 국악 인생을 시작한 그는 강도근 김영운 등 남원 일대의 소리꾼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운을 누렸다. 이어 18세에 상경한 그를 맞은 사람이 명창 박귀희였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 어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안다.

안숙선은 “이십대에 김소희 선생한테 배울 때, 삼십대에 정광술 박봉술 성우향 선생을 모실 때 진정 배움의 기쁨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스승의 축적된 역량을 내 안으로 향유한다는 사실이 느껴졌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이 대목은 그가 가장 정통적인 적자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말해주는 부분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정작 인간문화재는 가야금 병창으로 됐으니 특히 박귀희 선생님 뵐 면목이 안 서요.”

그러나 이 같은 경력을 보고 그를 제대로 읽어낼 수는 없다. 그에게는 가장 정통적인 것에서 출발해 이질적 장르들과 충돌하고 포용하는 작업에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코리안 심포니(지휘 홍연택)와 가졌던 일련의 협연 무대는 국악과 양악의 만남을 열었던 자리였다.

‘춘향가’ 중 ‘사랑가’를 오케스트라 반주와 창의 협연으로 되살려 낸 무대(편곡 백대웅 김희조)는 서양 문물에 떠밀려 뒤안길로 밀려나던 국악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시켜 준 계기였다.

이어 KBS 교향악단(지휘 정명훈)과 가졌던 ‘토끼가 용왕의 향연을 받는 대목’(‘수궁가’) 협연이 호평 받자 타장르가 그를 찾는 일은 점점 더 잦아졌다. 민요나 창작국악의 오케스트라와의 무대가 줄을 이었다.


끊임없는 실험으로 국악의 맛 살려

그는 실험의 기치를 더욱 올렸다. 사물놀이의 김덕수가 미국의 재즈 그룹과 만든 실험 음 악 집단 ‘레드 선’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다. 악보 없이 연주하는 선율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그는 “완전한 즉흥으로 서로를 배려는 모습은 우리의 시나위와 똑 같았다”고 돌이켰다.

김덕수의 ‘토끼 이야기’와 이광수의 ‘흥보가’ 등 그의 줄기찬 실험 행보에 일부 국악계 어른들은 우려의 뜻을 비쳤다. 그때마다 그는 “판소리는 다치지 않고 만나는 작업”이라며 설득하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KBS의 ‘열린 음악회’를 통해 보였던 양악과의 협연 무대는 재기 발랄한 랩 뮤지션들의 시선을 끌기 족했다. “이 시대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양음악과 대중음악 팬들을 우리 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였어요.” 그의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흥보가 기가 막혀’ 등 우리의 말맛을 살린 젊은 가수들의 랩 음악으로 현실화됐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신의 몫은 다했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서양 음악과 만나려면 서양 음악을 한국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며 “거기까지 하려면 작곡 능력까지 갖춰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동시에 최근 들어 그가 왜 판소리 다섯 바탕에만 열정을 기울여 왔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판소리 못지않게 그가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가 판소리 연극, 즉 창극이다. 1997년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부임해 지금은 예술감독으로 있는 국립창극단이 10월이면 창극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창극이 제대로 발전하면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처럼 진정한 우리의 음악극이 탄생하리라는 믿음도 더욱 커진다.

때문에 그가 만든 어린이 창극단에는 꿈이 실려 있다. 미래의 판소리 팬을 만들고 판소리 명인을 키워내겠다는 꿈은 7월의 국립극장을 어린이들의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무대 ‘토끼와 자라’로 구체화됐다.

그것은 국악을 양악과 접목하려 한 시도보다 더 합당한 것이라도 믿는다. 거문고를 배우고 있는 딸 최영훈(27)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어린이 창극 다섯 마당의 꿈을 채근하고 있다.


고수들과 국악의 미래상 제시

9월 호암아트홀에서는 황병기 김덕수 등 국악계의 고수들과 함께 국악의 미래상을 제시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판소리와 민요 등 자신의 전공 레퍼터리들을 새롭게 조합해 보일 예정이다. 10월에는 파리의 ‘파리 가을 축제’ 무대에 참여한다.

현지의 축제 기획자들이 직접 내한해 프로그램을 만들어 김일구 조통달 김수현 김영자 등 명창들과 함께 판소리 다섯 바탕을 나눠 부르도록 한 무대다.

안숙선은 우리 정서에 맞는 창작 사설을 엮어 내는 일도 자신에게 남겨진 몫이라고 믿는다. 그 동안 공연 일정에 쫓겨 내팽겨쳐 둔 ‘구운몽’ 등 고대 소설을 다시 꺼내 탐독할 요량이다.

또 일본의 노(能) 전용 공연 극장인 노가쿠도(能樂堂) 비슷한 판소리 전용 극장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믿음이다. 아무래도 푹 쉬는 것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팔자다.

장병욱 기자

입력시간 2002/08/23 11:00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