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도망간 지도자들

“남한은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나라, 정서가 이성을 지배하고 감성이 합리성을 지배하는 나라, 공직자들이 마음 놓고 거짓말하는 나라, 끝없이 과거와의 싸움으로 미래를 파괴하고 있는 나라, 관료가 떵떵 거리는 나라, 돈이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학생들이 지옥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라이다. 폭발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화평 전 의원이 최근 ‘병풍’, ‘신당’ ‘정몽준 바람’ 등 오늘의 정국을 예견한듯한 내용이 담긴 ‘지도력 위기’(새로운 사람들 刊)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의 선전 쪽지에 적힌 “너희가 민주주의를 아느냐”의 활자가 크다.

대선 주자들을 향한 꾸짖음일까. 그는 “내가 만약 국가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 이 책에 쓰여진 대로 사고하고 실천할 지침서며 조국의 21세기 이후를 겨냥한 ‘매니페스토 21(Manifesto 21)’이며 국가 최고지도자가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에게 ‘정치 참고서’로 권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레이건 혁명’의 청사진을 만들어 낸 미국 해리티지 연구소에서 1983년부터 5년간 머물면서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배웠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 당선과 96년 15대 옥중 당선은 어느 면에서 그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가 20여년 이론과 실천에서 느꼈던 건국 이후 7명의 대통령과 1명의 내각제 총리에 대한 지도력 평가에 따르면 ‘그의 조국’은 ‘지도자 부재’와 ‘지도력 위기’를 면치 못해왔다.

그는 지도자란 국가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길잡이이며 지도력은 지도자가 지닌 자질을 실제로 발휘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런 규정에 입각해 우리 역대 대통령들을 살펴 보면 ‘지도력 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도자의 유형을 선지자적(vision), 전사적(warrior), 개혁적, 전략적 지도자 등 4가지로 분류했다. 선지자적 지도자에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꼽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10ㆍ26을 수습하고 박 대통령의 근대화 노력을 마무리 지은 전사적 지도자로 분류했다.

자질이란 특별한 분류법도 적용, 역사에서 항복했던 지도자, 도망갔던 지도자, 거짓말 했던 지도자도 가려냈다. 우리 역사에서 항복했던 지도자는 고려 원종과 조선시대 인조였다. 원종은 1231년 몽골에, 인조는 1636년에 청나라 태종에 항복했다.

도망갔던 지도자는 고려 고종(1232년 강화도)과 조선의 선조(1592년 4월 30일 서울을 떠나 의주로)와 고종을 들었다. 조선 고종은 1896년 2월 11일~1897 2월 27일까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정사를 처리했다.

현대에도 도망간 지도자는 많다.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새벽2시에 일선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지 않은 채 경무대를 빠져 나갔다. 장면 총리는 1961년 5월 16일 새벽 내각제에서 군 통수권이 있는 총리임에도 불구, 서울 혜화동 수녀원으로 잠적했다.

또한 1989년 10월 26일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박 대통령 피살사실을 듣고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 명령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침묵했다.

재미있는 것은 예비역 준장이며 하나회 회원이었던 자칭 5공 민주장정 주도자인 저자가 군 상관이기도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내린 평가다. 먼저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옛 전우를 유배 시킨 것에 대한 이렇게 평가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었다고 구실을 달겠지만 야당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은인인 전직 대통령을 유배시킨 것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살아 남기 위한 도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대선 당시 그는 YS, DJ, JP와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가 정치보복을 하지 않기로 국민 앞에 거듭 약속 한바 있는데도… 직선 대통령임을 내세워 전 정권과 차별을 두면서 소위 5공 청산을 수동적으로 주도한 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행위이며 자신이 몸담았던 5공을 버렸다는 점에서 도망간 지도자다. 또 자신이 져야 할 지도자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도망간 것이다”고 규정했다.

그는 또 전사형 지도자로 근대화와 경제부흥의 기수로 평가했던 자신의 보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도망간 지도자’의 굴레를 씌웠다. 그는 가정했다.

“그가 연희동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국난을 극복하고 7년 동안 국가최고 지도자로서 자신의 정당성과 자신의 책무와 사명 완수의 필연성을 주장하며 국정을 수행했던 우리의 지도자가 어느날 국민에게 용서를 바라며 유배지로 떠난다는 것은 바로 그를 증오하는 국민들일지라도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으리라.

결국 가장 비참한 것은 그가 아니라 국민 자신이 아니었을까…전직 대통령을 그 정적들이 약속을 어기고 유배를 보낸 것은 잘못되었고 유배를 받아들인 것도 잘못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유감이다.”

국민은 그때 그와 같은 유감을 느꼈을까. 만약 그때와는 달리 국민들이 이런 지도자들의 도망 행위에 분노를 느낀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발전할 것일까. 책이 길지만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이들은 한번 읽을 만 하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8/2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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