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日 정상회담 이후의 북한

북·미 정상화 노린 일본카드, 한반도 주변국 외교지도에 큰 변화

북한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뒤집어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일본을 발진기지로 삼아 서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산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미국이 동북아를 공략하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다. 북한이 마침내 미국의 징검다리를 빌려 쓸 자세를 취했다.

8월30일 일본정부가 발표한 북한-일본 정상회담 합의 발표는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 구도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할 전망이다. 9월17일 평양에서 열릴 북-일 정상회담은 국제사회로 나오려는 북한의 노선이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대북정책 흐름 바꿀 카드

북한이 의중에 두고 있는 국제화의 최종 목표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다. 이를 위해 북한이 일차적으로 활용했던 카드는 한국과의 관계개선. 하지만 미국에 강경한 조시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한국 카드’의 효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여기서 북한이 보다 강력한 카드로 뽑아 든 것이 일본이다.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미-일 관계의 응집력으로 볼 때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카드임이 틀림없다. 북-일 정상회담은 일본을 징검다리 삼아 미국으로 향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나타낸다.

북한의 이 같은 의도는 북-일 정상회담 합의 과정에서도 감이 잡힌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관방장관은 30일 “양국은 1년 전부터 공식ㆍ비공식 접촉을 통해 국교 정상화 문제를 논의해왔다”고 밝혔다. 여기에 따르면 정상회담 준비 교섭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 노선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시기부터 이뤄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해 북-미 정상회담 교섭은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상당히 접근했던 북-미 관계 개선의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한 때와 시점을 같이 한다. 미국 대북정책의 흐름을 다시 한번 반전시키기 위해 일본 카드를 활용할 필요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만남은 사상최초로 열리는 북-일 정상회담인 만큼 의제가 매우 무거울 것이 틀림없다. 후쿠다 관방장관은 “현안을 해결하고 국교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양국 정상이 직접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도 보이듯이 이번 정상회담의 초점은 국교 정상화에 맞춰질 수 밖에 없다. 국교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정상회담은 외교 관례로 봐서도 수교의 전단계에 해당하는 의의를 갖는다.


과거청산ㆍ미사일 문제 등 현안 많아

수교로 방향을 잡는다면 양국은 필연적으로 두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일본측으로서는 일제침략에 따른 과거문제 청산, 즉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

반면 북한은 일본인 납치의혹 해소와 요도호 납치범 인도에 성의를 표해야 한다. 이는 일본 내 반북한 여론을 완화시켜 고이즈미 총리의 대북한 정책에 활동공간을 제공하는 효과를 갖는다. 나아가 북한이 일본을 미국에 이르는 징검다리로 여긴다면 미사일 개발 중지와 관련된 이야기도 이번 회담에서 운을 뗄 가능성이 크다.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고이즈미 총리는 30일 기자회견에서 “정상이 직접 만나지 않으면 양국관계가 한 걸음도 진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 국교 정상화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겠다”며 의지를 표명했다. 정상회담을 포괄협상 방식으로 합의한 것 역시 낙관론에 무게를 실어주는 요소다.

정상회담과 수교문제 논의는 당사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에도 해로울 것이 없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북한측은 우선 1990년대 초 나진ㆍ선봉지구 개방을 통해 시현한 부분적인 대외개방과 지난 7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경제개혁의 연장선상에서 대일 관계를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수교 조건으로 받게 될 최고 100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북한이 시작한 가격개혁을 지탱하는 효자 노릇을 할 것이다.

일본은 대북한 관계개선을 통해 대외적, 대내적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일본이 동북아에서 외교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다. 국내적으로는 바닥으로 떨어진 고이즈미에 대한 지지도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다. 정상회담을 통해 고이즈미는 북-일 관계 정상화를 성사시킨 총리라는 역사적 이미지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동북아 외교 다자간 게임으로 확대

북-일 정상회담 교섭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사전 조율이 없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대테러 전쟁과 동시에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동북아 안정, 특히 북한을 중립화시키는 것이 선결과제다. 이런 측면에서 북-일 정상회담은 현단계 미국의 동북아 정책과도 이해가 맞아 떨어진다.

중국은 북-일 관계개선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경제발전을 위한 우호적 주변환경 조성에 외교력을 기울여 온 중국에게 한반도 안정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외교관계를 다변화할 경우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외교공간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북한의 개혁개방 노선이 큰 틀로는 중국 모델을 따를 것으로 본다. 중국은 북한이 중국 모델을 배우는 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 수준 유지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북-일 정상회담 합의 발표는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끝난 직후에 나왔다. 러시아 방문에서 김 위원장은 유라시아 횡단철도(TRS) 연결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TRS가 북한, 한국과 연결돼 태평양으로 진출할 경우 러시아가 얻는 경제적 효과는 매우 크다.

하지만 TRS의 한반도 연결 효과는 일본 화물이 연계되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그칠 우려가 있다. 러시아가 북-일 관계개선을 통해 얻게 될 경제적 기대치가 크고, 그런 만큼 정상회담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

북-일 정상회담은 북한을 둘러싼 동북아 외교지형을 다자간 게임으로 확대시키는 중요한 걸음이다. 결과는 북한의 내부에 달렸다. 북한이 개혁과 개방을 노선으로 채택했다면 북-일 관계개선은 완급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배연해 기자

입력시간 2002/09/09 10:28


배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