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4억달러 미스터리?

대북지원설 의혹, 남북 화해무드 속 '신 북풍'으로 번질 가능성도

정부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성사의 대가로 4억 달러(한화 4,900억원)란 거액을 북한측에 제공했다는 한나라당의 의혹 제기가 대선 정국을 뒤 흔드는 ‘태풍의 눈’으로 떠오를 조짐이다.

그 파문은 이미 민주당을 거쳐 청와대로 향하고 있으며 대선 후보로 나선 정몽준 의원 등 현대 가(家)의 발목을 잡을 태세다.

북일정상회담과 미국의 대북특사 파견, 남북한 철도 연결 및 신의주 특구 개방, 북한의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 등을 계기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남북간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폭우’를 몰고 올 가능성도 있다.

아시안 게임에 참가한 북한대표단은 이미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방문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부하는 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선 겨냥한 ‘진실게임’으로 번져

국회 재정경제위는 10월4일 산업은행 국감에서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현대상선 거액 대출시 산은 총재)과 엄낙용 전 산은 총재(이 위원장 후임),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등 현대상선을 통한 대북 지원설의 실체를 파헤칠 태세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북 지원설을 현대가(정몽준 후보)와 청와대(노무현 후보)를 동시에 압박하려는 한나라당의 ‘신 북풍공작’으로 보고 맞불작전에 나서고 있다.

‘4억 달러 대북 비밀지원설’의 진원지는 올 3월 미의회조사국(CRC)이 ‘한국의 정보소식통’을 인용해 작성한 ‘한미관계 보고서’다. 보고서는 1998~2000년 현대의 대북 송금액을 공식ㆍ비공식 각각 4억 달러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여기에 구체적인 근거를 추가해 의혹을 제기했다. 정부가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 전후로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과 현대아산 등을 통해 4억 달러를 북측에 비정상적인 루트로 제공했다는 것.

또 지원 자금은 한국산업은행이 그 해 6월7일 현대상선에 제공한 당좌대월(當座貸越) 4,000억원과 산업운영자금 900억원(6월29일 제공)이라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이다. 한나라당과 정부ㆍ민주ㆍ산은 측이 ‘진실게임’을 벌이는 4억 달러 지원설의 미스터리를 정리해 보자.


정상대출이었나?

현대상선에 대한 산업은행의 대출과정이 과연 적정했을까? 산은이 현대상선의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을 제쳐놓고 총 여신규모(2,600억원)의 2배에 가까운 4,900억원에 대한 대출요청서를 받은 지 불과 이틀 만에 선뜻 지원한 배경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금융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또 자금 지원 이후 산은이 자금 사용처에 대해 확인도 하지 않는 등 사후관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점도 의혹을 키우는 대목이다.

산은은 “통상적으로 워크아웃 기업이나 법정관리 기업에 대해서는 대출금의 용처(用處)를 확인하지만 당시 현대상선은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정상 기업이었기 때문에 용처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000년 3월 ‘왕자의 난’(몽구ㆍ몽헌 회장간 경영권 분쟁)과 4월 현대투신 자금 위기, 5월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설 확산 등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책은행이 긴급자금을 받은 현대상선을 ‘정상기업’과 같이 처리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산은으로부터 4,000억원을 빌린 현대상선이 기존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등 15개 금융기관을 통해 900억원의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은이 2차로 900억원을 빌려준 것에 대한 의문도 남는다.


고위층 외압의 실체는?

“현대상선이 2000년 6월7일 대출금 4,000억원을 국정원에 넘기라는 고위층의 지시를 받고 산은 서울 여의도지점에서 2,000억원, 본점 영업부와 서울 구로지점에서 각각 1,000억원의 자기앞 수표를 발행, 이를 국정원에 넘겨줬다.

그 후 국정원이 주도해 자체 국내외 계좌와 국내 외국계 은행 등을 여러 차례 오가며 자금세탁을 한 것으로 보인다.”(이재오ㆍ김문수 한나라당 의원 주장)

고위층 외압설의 실체는 10월4일 산은에 대한 국감에 나올 증인들의 진술이나 ‘돈의 흐름’에 대한 계좌추적이 이뤄지지 않고는 밝혀지기 어렵다. 다만 “산업은행의 4,900억원은 우리가 쓴 것이 아니다”라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의 발언이 시사하듯 정황 근거에 따른 배후설의 추측만 있을 뿐이다.

일부에선 당시 국정원장과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주도한 현 청와대 고위층이 4억 달러 대북 비밀 지원의 배후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럼 돈 어디에 썼나?

현대상선은 대출자금의 용처를 놓고 현대건설과 현대아산 등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에 얽힌 당시의 내부 속사정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현대상선측은 9,10월 기업어음(CP) 상환용으로 1,740억원, 선박 용선료 1,500억원, 선박건조 관련 상환금 590억원, 회사채 상환금 170억원, 운영자금 900억원 등으로 대출자금 4,900억원을 모두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분식회계 등이 횡행한 기업 사정을 고려할 때 대출자금이 현대상선측의 사용 내역대로 집행됐는지 여부에 대해 밝혀진 것은 없다. 한 금융관계자는 “분식의 방법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며 “비자금을 조성하려면 연간 매출 7조원에 달하는 현대상선의 경우 4,000억원을 모으는 것은 식은죽 먹기보다 쉽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따라서 현재로선 금융감독원의 현대상선에 대한 분식 회계 감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확인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계좌 추적권을 발동할 지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북으로 갔다면 송금 방법은?

현대상선이 4억 달러라는 거금을 북한측에 비밀리에 송금하려면 자금을 일일이 쪼개 돈세탁, 환전, 회계분식을 거치거나 대금 지급처와 사전약속을 통해 뭉칫돈을 별도로 모아야 한다.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현대상선과 현대건설이 현대아산, 또는 국가정보원을 거쳐 홍콩, 싱가포르에 있는 페이퍼컴퍼니(유령 기업)나 가상계좌를 통해 북한으로 송금했다면 거래은행에 송금자료가 남게 된다.

문제는 과거 대우의 외화밀반출 사례가 보여주듯 해외 페이퍼컴퍼니나 유령 계좌를 발견할 수 있을지 여부다. 계좌추적 등 철저한 검찰 수사만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게 금융권의 지적이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10/04 15:08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