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이 巨匠] 한국 추상미술의 대부 박서보

"내 작업은 나를 만나는 원초적 행위의 기록"

“답답하다 싶으면 조금도 못 견디는 습성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행여 어찌 된 건 아닌가 싶어 요즘에는 치매 예방도 할 겸 MRI 촬영을 빼먹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그가 실제로 소일하는 곳은 156평에 3층 높이의 훤칠한 공간이다.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딴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보(栖甫)문화재단에서 화가 박서보(72)는 하루 너댓 시간 잠을 자는 것 말고는 계속 작업 한다. 이번 추석 때도 충북 음성에 있는 부모의 산소를 찾아 간단히 노제만 지내고 올라와서는 또 일했다.

널찍한 물류 창고를 닮은 이곳은 이현재 건축소가 설계한 덕택에 현대 한국의 10대 건축물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그러나 한여름에는 통풍이 잘 안 되는 탓에 지독하게 높은 습도와 온도를 견뎌야 한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지경이다. 잠 자는 4~5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작업에 바치지 않으면 그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 열기가 오르면 화장실에도 안 가고 5시간 줄곧 작업 할 때도 있다. 그를 도와 주는 홍익대 미대의 조교급 조수들이 먼저 지쳐 나가 떨어지더라도 그는 아랑곳 않는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사람”

199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를 정년 퇴임하기 전인 1994년에 건립된 이 곳은 30여평의 넓이가 그의 대작들과 운을 맞춘다. 천정이 8m인 덕에 그가 늘 해 온 대작을 제작하는 데는 전혀 손색이 없다. 130~500호가 보통이고 때에 따라서는 1,000호를 넘어서기도 한다.

“칠순 넘은 노인이 아직 이러니, 딴 사람들이 보면 미친 놈이죠. 일흔 둘의 나이에도 올해에만 개인전이 8개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세상의 수요가 끊이지 않는 데는 도리가 없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우선 9월 25일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리는 작품전 다음에는 멜버른(10월 3일)과 LA전(10월 18일) 등 큼직한 해외 전시회가 기다린다. 7순의 나이에 저렇듯 왕성한 창작 활동을 과시하는 작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아 보기 힘들다.

여느 전시회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그렇게 하듯 그의 작품은 멀리에서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요즘 흔히들 하듯 컴퓨터 모니터상으로 불러 내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그림은 별 감흥도, 영감도 불러일으키지 못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 다 본 그의 화면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빗살무늬를 연상케 하는 규칙적인 이미지는 색채를 입히고 밀어 붙여 만든 철저한 수작업의 결과이다. 그의 그림은 복제를 철저히 거부한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추구하고 있는 ‘묘법(描法ㆍecriture)’은 그의 필생의 작업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빗으로 긋는 듯한 반복적 행위는 마음의 평정과 금욕적 분위기로 충만하다”고 서술한다.

작가의 의식을 시각화한 결과이며 화면에는 ‘그린다’는 행위만이 존재한다. 물감과 한지의 엉김이 켜켜이 기록돼 있는 그의 그림은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나 사상을 형상화하기에 앞서 가장 원초적인 행위의 기록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캔버스 위에 유채를 몇 번씩 겹쳐 바르고, 그 위에 한지를 9장 겹쳐 바른다. 손가락, 연필, 쇠꼬챙이 등으로 밀어 붙여 나간다. 보통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두세달은 족히 걸리는 이 작업은 세계의 어떤 흐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성으로 세계 화단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는 “나는 나의 수신(修身)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며 “내 그림은 자기를 벗어나 자기를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초극(超克)과 몰아(沒我)의 과정이다.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기 힘든 자기 회화의 특성에 대해 그는 “무엇보다 현대적인 것, 추상적인 것은 서양에서 왔다는 고정 관념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잊으려 한다. 선비가 하루 종일 아무 의미 없는 난을 치듯, 스님이 끊임 없이 염불을 하듯, 그의 회화가 바로 그것과 똑 같다.


그림은 몰아의 세계로 빠져드는 도구

동양성과 서양성이 언제나 길항하는 작품 세계를 통해 그는 ‘가장 한국적인 현대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에서 펴낸 ‘예술의 기초(Art Fundamental)’는 ‘재질감(Texture)’이란 항목 맨 앞에 그의 1993년 작 ‘Ecriture No.931215’를 전면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고흐, 모드리안,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미술의 대가들과 거의 맞먹는 대접이다.

10월 18일에서 두 달 동안 LA의 에이스 갤러리에서 펼칠 개인전은 세계 현대미술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웅변한다. 현대미술의 보고라 불리는 이 곳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전시회를 갖지 못 했던 곳이지만 그는 1997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갖는 것이다.

사방 14m의 대형 전시장에서 펼쳐질 이 전시회에서 그는 4작품만을 선 보일 작정이다. 커다란 벽 한 구석에 작품 한 점만이, 그것도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다.

“작품 한 점으로 벽 하나를 감당해 내는거죠.” 갤러리 대표 더글라스 크리스마스는 “복제와 모방이 극으로 치달은 오늘날의 문명 현상을 한 걸음 뒤에서 보고 반성할 수 있게 해 준다”며 “이번 전시회는 크게 성공할 것 같다”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전시 컨셉트를 갤러리측에 알리지 않았다. 작품 배치도는 미국 입국 직전 팩스로 부칠 계획이다.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낄낄 웃으며 그는 “방 한 가운데에는 설치품을 하나 전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생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생활 소품을 하나 배치할 작정이다. “미국놈들 엿먹으라는 심정이지.”

그는 미국을 ‘특별한’ 방식으로 만났다. 홍익대 1학년 때 6ㆍ25를 당한 그는 꿀꿀이죽으로 시장기를 속이고는 스케치북을 들고 화신백화점으로 향했다. 양색시를 끼고 아서원으로 들어가는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챙긴 1, 2 달러로 “걸레처럼” 연명하던 시절의 기억은 불의를 용납 못 하는 사람으로 그를 만들었다.

1956년의 ‘반국전 선언’은 그 시작이었다. 그는 한국미술계가 지나친 인맥 위주 풍토에 빠져 일제식민지 이후 시작된 생명력 없는 사실주의 화풍을 답습하고 있다며 과감한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신문 시평 형식으로 발표했다. 당시 25세. 그 대가로 한동안 취직의 길이 끊겼음은 물론 빨갱이라는 구설수까지 들어야 했다.

그는 “요즘 영악한 놈들이라면 그런 짓을 하겠느냐”며 당시의 정황을 넌지시 비춘다. 옳지 않다고 믿는 것과 절대 타협을 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그는 홍익대 교수 시절에도 교육 제도 개선을 주장하다 3년 동안 실직하기도 했다.


“10년안에 주목받는 평면작가 될 것”

2001년 칠순 기념 화집 출간 연설서도 그는 뜨거운 피를 여전히 입증했다. “지난날 나는 ‘앞에 가는 똥차 비키시오’하고 선배들을 향해 소리 쳤습니다. 나는 평생을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 작업을 해 왔습니다. 곁눈질 하지 않고, 바보처럼 외길을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용수철에 비긴다. 용수철을 발로 꽉 밟으면 누른 강도 만큼 튀는 탄성의 법칙은 곧 그의 삶의 법칙이다.

그는 “나는 앞으로 10년 이내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평면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멜버른과 LA에서의 전시회를 끝낸 다음에는 10월 30~11월 5일 개최될 쾰른 아트 페어에 출품할 작품 마무리로 바쁠 것이다. 쾰른에 걸 작품으로는 500호 짜리 신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래도 못 알아 들어, 하고 한 대 쥐어 박는 거죠.”

그는 자정에 일기를 쓴다. 일체의 문학적ㆍ주관적 내용을 배제하고 그날 있었던 일을 깨알같이 빽빽이 적어 간다. 1968년 동경 한국현대미술전서 알게 된 후 편지를 자주 주고 받은 재미화가 이우환은 오랜 세월 동안 똑 같은 필체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편지를 보고 “자기 의지와 절제력이 대단하다”고 그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홍익대 미대 학장 시절에도 권유가 있었으나 그는 골프 치기를 거절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보문화재단과 안성에 사 둔 땅 5,000평 등은 사회에 기증할 작정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어요. 모두 빌려 쓰는 거지.”

그는 “지금껏 나의 모든 작업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라며 “관에 못질 할 때 나의 도전 정신이 멈출 것”이라고 예언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0/0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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