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도박…신의주 특구] "美 눈에 들어야 자본주의 실험 성공"

대미관계 개선에 사활 건 北, 깜짝카드로 관계 급진전될 수도

한반도 문제의 핵심 고리인 북미관계가 21개월 만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10월 3~5일 방북은 지난해 1월20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동결된 북미관계가 대화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최근 남북, 북일 관계를 중심으로 급진적으로 개선돼온 한반도의 역학구도가 세계 패권국이면서 지역패권국인 미국의 주도로 재편되는 측면도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와 차이가 있다면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북한에 다가서고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대화에 나섰다는 점이다.


북한의 간곡한 특사 요청

켈리의 방북은 미국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지만 북한이 먼저 손을 내밀면서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은 “북일 정상회담의 화해 분위기를 살리려는 북측의 적극적 요청으로 9월 23, 24일 뉴욕에서 잭 프리처드 대북교섭대사와 박길연 유엔주재 대사간에 접촉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이 같은 태도는 남북, 북일 관계 등 ‘외곽’이 어느 정도 다져졌다는 나름의 정세분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특히 북미 대화를 통해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국제정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전쟁의 불똥을 피하고, 한 발 더 나가 이 기회에 ‘사활적 이해관계’인 미국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목줄을 쥔 미국

더욱이 최근 내부적 경제 개선조치, 특히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지정한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도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입장이다.

가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파격적으로 내놓은 신의주 특구만 하더라도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가 뒤따르지 않으면 외국자본 유치가 어려워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등의 가시적인 조치가 없을 경우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금융기관을 통한 대북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으로 마련된 북일수교 가능성도 미국의 ‘묵인’ 혹은 ‘재가’가 없으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지켜보기엔 너무 나간 북한

‘패권국’ 미국 입장에서도 연일 파격적인 조치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북한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처지였다.

미국은 특히 ‘최대 동맹국’일본이 경제적 동인, 내부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된 북한에 접근하자 상당히 당황했다. ‘북한이 무릎을 꿇지 않는 한 나서지 않겠다’는 태도로 뒷짐을 지고 있던 미국 행정부 내에서는 이대로 방치했다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목소리가 득세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북일 관계 진전으로 미국이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됐다”면서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어떻게 다룰 지 입장차이를 보이고 있고, 한국에서 미국이 남북통일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반미감정이 고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발걸음 무거운 켈리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길에 오르는 켈리 차관보의 마음은 그리 가벼운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북한이 최후의 체제유지수단으로 움켜쥔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과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는다”는 부시 대통령의 언급을 상기하면, 미국의 특사가 평양에 간다면 뭔가 가시적 성과가 담보돼 있어야 앞뒤가 맞는다. 이 같은 정치적 부담 때문인지 미 국무부는 “첫 대좌인 만큼 양측의 기본입장을 개진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미리 선을 긋고 있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도 “김정일 위원장이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WMD를 확산하고, 휴전선 일대에 재래식 무기를 배치하고 있는 상황 등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생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의 빅딜 가능성

차관보인 켈리의 ‘격’을 고려하면 김 위원장과의 면담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북미대화 진전의 열쇠는 북한 최고통치권자인 김 위원장이 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김 위원장이 어렵게 재개된 북미대화를 개선할 의지가 있다면 북일 정상회담 때 전격적으로 보여준 일본인 납치문제 사과처럼 미국의 관심사안인 핵ㆍ미사일 문제에 대해서도 ‘깜짝 카드’를 내놓아야 한다.

북한이 핵 조기사찰 전면수용, 미사일 개발ㆍ생산 및 수출 중단을 확약하면 북미관계는 급진전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전향적 태도를 보일지는 미지수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을 비롯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이 ‘적어도 핵사찰에는 3, 4년이 걸린다’고 주장한데 대해 ‘3, 4개월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 미사일 문제에 대해서는 핵 보다는 유연했지만 연간 10억 달러 안팎의 충분한 물질적 보상 등을 요구해 왔고, 미국은 ‘돈을 주고 위험을 살 수 없다’고 맞서왔다. 정부 당국자는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핵과 관련된 모든 국제적 합의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대목을 주목한다”면서 이번 특사회담에서 북미관계를 원천적으로 개선할 ‘빅딜’이 있을 가능성을 기대했다.

이동준 기자

입력시간 2002/10/09 15:38


이동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