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현대 미스터리 관전법

“노벨 평화상의 상금이 얼마지? DJ(김대중 대통령)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에 4억 달러를 줬다면 우리는 노벨평화상 상금을 제하더라도 엄청 손해본 것 아니야?”

“다 (북한에) 갔겠어요? 누군가 떡고물을 챙겼겠지요.”

“떡고물을 빼고도 (돈이) 엄청 갔을 거야. 우리가 (90년대 초반에) 모스크바에서 뿌린 돈을 생각해봐. 돈 없이 뭘 할 수 있어? 오죽했으면 노통(노태우 대통령)도 30억 달러를 고르바초프(소련 대통령)에게 준다고 약속했겠어.”

현대상선이 한국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4,900억원의 행방을 놓고 정치권이 ‘진실 게임’을 벌였던 지난 주말, 한 모임에서 오갔던 대화다. 참석자는 IMF 외환위기 직후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주재원들. 대부분 한소 수교 초반에 러시아(소련)에서 친한 인맥을 구축하면서 사회주의의 실체를 체험한 1세대들이다.

러시아 정부를 공략했던 한 인사는 “국장급 인사 한 명을 만나려고 해도 돈을 건네야 했다”며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은밀한 돈 거래가 많다”고 확신했다. 북한을 러시아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지만 어쩐지 이번에도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돈 냄새’가 남북 양쪽에서 난다는 것이다.

현대상선의 돈이 실제로 북한으로 넘어갔는지 여부는 오직 담당자만이 안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체감 지수야 언론 보도나 사회적 상식에 따라, 또 개인별로 다를 테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돈 냄새를 맡았던 사람들이 “(4억 달러 보다) 더 갔으면 더 갔지 덜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는 솔직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북으로 간 우리 돈의 사용처에 대한 고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5일 국감이 끝날 때까지 밝혀진 것은 현대상선에 대한 거액 대출이 비정상적으로 이뤄진 것 같다는 게 전부다. 권력핵심부의 대출 압력 혹은 사전 인지 여부, 돈의 성격과 규모, 행방은 물론이고 소위 ‘평양 커넥션’의 존재 여부 등이 앞으로 규명돼야 한다.

이 실체가 밝혀지면 현대상선 사건은 집권여당이든, 의혹을 폭로한 한나라당이든 어느 한쪽은 12월 대선에서 완전히 망가질 수 밖에 없는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사건의 진전이나 정치권 공방을 지켜볼 때 늘 염두에 둬야 할 관전 포인트다.

그래서 언론들이 계좌추적을 해서라도 돈의 흐름을 규명하고 혼탁한 ‘정쟁’을 끝내라고 촉구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실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권구도와 맞물려 있는 이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대선까지 계속될 것이고 여러 차례 정국을 흔들어댈 것이다.

집권여당은 일단‘평양 커넥션 의혹’을 한나라당의 정치공세로 일축하고 계좌추적에 나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현대상선의 김충식 전 사장도 미국으로 몸을 피한 상태다. 이번 사건을 처음 터뜨린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마저 “계좌추적이 이뤄지지 않는 한 실체 규명이 어렵다”며 쉽게 끝날 게임이 아님을 인정한다.

한나라당도 10일 문을 여는 정기국회를 앞두고 국정조사와 특검제를 요구하는 등 대여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겠지만 실체 규명에 다가가는 실제 행동에 들어갈 가능성은 낮다. 금융감독원이 끝까지 금융실명제법을 내세워 계좌 추적을 거부할 경우 한나라당에겐 ‘검찰 고발’이라는 또 다른 카드가 있지만 이를 쉽게 꺼내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남북정상회담의 ‘평양 커넥션’을 제기하면서 12월 대선을 앞두고 예상되는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같은 ‘깜짝 쇼’를 막을 수 있는 심리적 방어막을 구축했고, 의혹의 실체가 너무 빨리 벗겨질 경우 정치적 공세의 주도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선거전략상 집권여당측에서 언제 꺼낼 지 모르는 ‘병풍’이나 또 다른 ‘풍’의 대항 카드로 ‘평양 커넥션’을 활용할 것이다. ‘병풍’이나 현대가문의 정몽준 의원이 일으키는 바람이 태풍으로 변할 때 계좌추적을 겨냥한 ‘검찰 고발’이라는 강수로 정국의 반전을 노리는 전략이다.

현상유지만 잘하면 대권을 쥘 가능성이 높은 한나라당으로서는 굳이 리스크가 있는 ‘올 오어 낫싱’ 게임에 스스로 뛰어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언제 이 카드를 꺼내느냐가 관전의 또 다른 포인트가 될 것이다.

집권여당은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물증이 없는 한, 아니 물증이 제시되더라도 국민이 정부의 해명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집권여당은 현대상선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정국을 반전시킬 수 있는 새 카드를 모색할 것이다. 국감장에 나온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당당한 모습은 아직 ‘정치게임’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정부 관리들은 자신의 관운을 건 ‘줄서기 게임’에 들어간다. 대형 폭로나 양심선언도 이제는 차기 정권을 겨냥한 줄서기의 일환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현대의 ‘진실 게임’이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것은 당사자들의 전략과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2/10/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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