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 사로잡힌 여자들

'섹스 앤 더 시피'등 미국 시트콤 인기몰이, 달라진 성 풍속도

“오르가슴은 지어낼 수 있지만, 애정이나 친밀감은 지어낼 수 없어.”

“여자가 남자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침대 위야. 만약 우리가 남자들에게 영구히 오럴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꺼야.”

‘성(性) 담론’을 전면에 내세운 외화 프로그램들이 방송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진원지는 케이블ㆍ위성 채널이다. 우선 대중매체에서 금기시해온 노골적인 성을 테마로 하는 미국 시트콤들의 파격성이 눈길을 모은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나올 만한 대담한 내용들이다. 게다가 그런 발언의 주인공들이 미혼 여성들이라는데 입이 벌어진다.

이들 프로그램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신세대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업고 공중파의 주요 프로그램을 위협하고 있다.

영화전문 케이블 방송 OCN 방영중인 ‘섹스 앤 더 시티(Sex & The City)’는 밤 12시 이후 방송되는데도 전체 시청률 1.2%, 케이블 TV 점유율 15.2% (TNS 미디어 코리아 조사결과, 10월 1일)로 올라섰다. 같은 시간대 공중파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보통 2~5%인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인기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청자층이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20~30대 젊은 여성들이 열광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성문화 코드

외국계 홍보회사에 다니는 이수정(28)씨. 토요일 밤이면 아무리 재미있는 모임이 있어도 12시를 넘겨 귀가하는 법이 없다. 12시부터 방영되는 '섹스 앤 더 시티'를 시청하기 위해서다. 그는 “매주 토요일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정도”라고 털어 놓는다.

이씨는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섹스 드라마에 너무 빠져 있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에도 당당하다. “단순히 섹스가 아니라,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성 문화 코드를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맞선다.

‘성’에 관해서는 무조건 모르는 척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성 풍속도다. 이씨와 같이 사랑과 성을 주제로 대화를 끌어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는 신세대 여성들은 계속 늘고 있다.

이들은 밤마다 하룻밤 잠자리 상대를 찾아 나서거나 애인을 오르가슴의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미국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낸다.

우리나라에 ‘성담론’ 열풍을 몰고 온 주역은 미국 NBC TV의 시트콤 ‘프렌즈(Friends)’와 ‘앨리의 사랑만들기(원제 Ally McBeal)’와 ‘섹스 앤 더 시티’ 등이다.

‘프렌즈’는 1994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끊임없이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 뉴욕에 사는 개성 넘치는 세 여자와 남자가 벌이는 사랑과 우정을 다루고 있다. 인터넷에는 수십 개의 팬 페이지와 영어 동호회가 개설돼 있다. 코리아닷컴의 프렌즈 동호회는 이미 회원수 3만명을 넘겼다. 현재 동아 TV에서 하루 세 차례(오전 11시 10분, 오후 8시, 밤 11시 10분)에 걸쳐 방송된다.

영화채널 ‘홈 CGV’가 매주 월~목 밤 12시 30분부터 방영하는 ‘앨리의 사랑만들기’는 앨리 멕빌이라는 여자 변호사를 중심으로 법률사무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진정한 사랑을 찾아 나선 주인공 앨리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하다. 미국 FOX TV가 1997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미국판 ‘처녀들의 저녁식사’라고 할 만한 ‘섹스 앤 더 시티’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네 명의 뉴욕 독신 여성들의 ‘성담론’을 소재로 한다. 캔디스 부시넬이 ‘뉴욕 옵저버’지에 연재한 동명의 칼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골드글로브 상을 3회 연속 수상할 정도로 구성이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채널 HBO(매주 토요일 밤 12시)와 OCN(매주 화~수 밤 12시)에서 볼 수 있다.


해당 케이블방송 시청률 쑥쑥

이들 프로그램은 해당 방송사의 시청률을 톡톡히 올려주는 효자 프로그램이다. 방송사 게시판에서는 이 시트콤 때문에 가입했다는 시청자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HBO의 장현 부장은 “남녀가 모두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지만, 특히 젊은 직장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프리챌과 다음 카페 등에서도 이들 프로그램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다. 1만 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카페가 수두룩하다. 미국 시트콤 마니아들은 이들 카페에서 해당 프로그램의 미시청분이나 지난 줄거리에 대해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고, 주인공들의 성 문화에 대한 토론을 펼치기도 한다.

영어 대본과 동영상을 구하려는 대학생들도 넘쳐 난다. 영화제작관련 서비스업체인 ‘파라마운트’ 마케팅팀 신경모 대리는 “‘섹스 앤 더 시티’ DVD는 발매 한 달여 만에 5,000~6,000장이 팔려나갔다. 이미 두터운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어 다음 시리즈를 속속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미국 시트콤은 인기의 비결은 ‘성’에 대해 솔직하고 대담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섹스와 사랑에 대한 젊은 층의 비밀스런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직선적인 대사와 소재가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섹스를 하다가도 다른 생각이 들면 일을 핑계로 침실을 뛰쳐 나오고, 상대방의 테크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 이것밖에 못하냐?”고 곧장 불만을 뱉어낸다.

주인공들이 모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계층이라는 것도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변호사, 칼럼니스트 등 전문가 계층의 독립적인 라이프 스타일과 감각적인 패션 및 액세서리 등이 젊은 층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

다른 문화에 대한 동경심도 인기 열풍을 부추기는데 한 몫을 한다. 한 방송작가는 “젊은 여성들이 한국 드라마에서 다루지 못하는 자유로운 성과 생활방식을 동경하면서 미국 시트콤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허상의 서구문화 추종' 우려의 목소리도

허상의 서구 문화를 추종하는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김주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미국 시트콤에서 보여주는 자유분방한 성 생활과 옷차림은 미국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파격적인 경우에 속한다. 드라마에서 과장되게 표현되는 허상의 문화와 일상적인 생활을 구분, 올바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2/10/13 15:13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