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인왕산 선바위

서울의 도성은 북악, 인왕, 목멱산(남산), 낙산의 산마루와 산줄기를 서로 연결해 가면서 꾸불꾸불하게 쌓아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을 쌓을 당시는 말도 많았던 모양이다.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뻗어 만리재에서는 다시 남산으로 잇자는 주장도 나오는 등, 도성을 어느 규모로 어떻게 연결시켜 쌓아야 할지 결정을 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눈이 수북하게 내려 쌓이고, 날이 밝자 신기하게도 도성자리 안쪽은 눈이 말끔히 녹았고 바깥 쪽만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그것을 곧 하늘의 계시로 그어진 선이라 믿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은 것이 오늘의 도성자리라는 것이다.

조선 태조이 교서에서는 '성곽은 곧 나라의 울타리이나, 포악함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터전이니라'라고 말했다.

비록 천민일지라도 백성이거늘 성밖의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일까. 도성을 쌓는데 왕사인 무학대사는 인왕, 무악, 남산으로 연결시키고자 주장했고 정도전은 인왕에서 남산으로 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맞섰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무악을 연결시키자고 주장한 무악대사는 현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다른 이름으로는 길마재, 무학재, 모래재, 추모현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 태조가 도읍 자리를 물색하는데 하륜이 무악 남쪽으로 추천하니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했다. 이때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불러 자문을 구했고 이 바람에 무악재가 무학재로도 불리게 됐다.

고개의 모양이 소의 갈마같다 하여 길마재로, 또는 모래내의 이름을 따사 모래재라고 불렀다. 뒷날 영조 45년(1769년) 영조가 그이 아버지 숙종의 능은 명릉을 구미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명릉쪽을 바라 본 뒤부터는 추모현이란 이름도 붙었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이 이 고개를 보고는 '하늘이 천 길의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가히 천군을 누를만 하다'고 감탄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무악재의 이름을 딴 것이 무악동이요, 무악재의 이름을 딴 것도 무악동이요, 이 무악동 뒷산이 인왕산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사직단으로 흘러 내인 능선 중턱의 도성 밖 서쪽에 선바위가 있다. 마치 장삼에 고깔을 쓴 모양의 바위로, 언뜻 보아 불심 깊은 거인이 바위로 굳어진 모습이다. 그래서 선암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위가 우뚝 서 있다는 의미의 선바위가 선암이란 불교식 이름으로 미화된 것 같다.

도성을 쌓을때 무학대사는 이 바위을 성 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이 바위를 성밖으로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 이 바위를 성 안네 넣을 경우 불교가 융성하고, 성 밖으로 할 경우 유교가 왕성하게 된다 "는 정도전의 충고를 들은 태조 이성계가 용단은 내려 오늘처럼 선바위가 성밖에 자리하게 됐다. 무학대사는 태조이 이 같은 결정을 두고 "앞으로 중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싲우할 신세로구나"라고 크게 한탄했다고 한다.

입력시간 2002/10/1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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