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빵과 과자를 굽는 장인, 권상범

"빵만으로 살수 없다고요?"

“왜 굳이 빵이냐고? 자기를 가장 잘 아는건 자기니까. 열심히 하면 분명 길이 있을 것 같아서. 아쉬울 것도 없을텐데 왜 아직도 사서 고생이냐고? 어차피 하는 일, 마음을 듬뿍 담아하는게 나부터 즐거우니까. 평생 신조는? 게으른 사람은 천하에 구제불능이다!”

빵 기술자 겸 리치몬드 제과 대표 권상범(57)씨의 사무실 입구는 요즘 축하 화분들로 가득 차 있다. 권씨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하는 전시대의 케익들이 꽃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는 최근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지정한 제과제빵분야 ‘올해의 명장’으로 선정됐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빵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것 참, 앞으로 일하기 더 어렵게 됐습니다. 꼭 무슨 올가미에 걸린 기분입니다. (웃음)”

어린 나이로 제빵기술을 배운지 40여년. 나이가 들면 좀 편안해질까 했더니 오히려 더 바쁜 인생이다. 그는 빵 만들기에도 일류기술자지만, 동종업계에서 해외 출장이 가장 잦은 사람이기도 하다. 수시로 유럽을 찾아가 정보와 장비를 챙긴다.

유럽은 빵의 본 고장. 눈에 띄는 새 제품마다 사들고 호텔로 돌아가 일일이 맛을 보고 후보작을 고르느라 체류기간 내내 밤잠을 설친다. 관광같은 건 눈길 줄 사이도 없다. 정식으로 기술을 산 뒤 국내에 돌아오면 다시 권상범식으로 응용개발한다.

서울 서교동의 본점을 비롯해 총 4개의 매장을 가진 권씨의 제과점에 손님이 많은 것도 이같은 권씨의 남다른 열성과 부지런함 덕분이다. 권씨네 가게에서 선보이는 메뉴는 약 400종. 연매출액 10억원대를 기록하는 당당한 제과점이다.

국내 곳곳의 제과기술자들은 물론, 젊은 날 권씨가 기술을 배우러 찾아갔던 일본에서도 이제는 거꾸로 권씨네 가게에 기술자들이 찾아온다. 권씨네 빵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어깨너머로 익힌 제빵기술

그는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다. 고향은 경북 의성,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다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취업전선에 나섰다. 어릴 적 다과점을 운영하는 외가집을 보면서 품었던 꿈으로 대구의 한 제과점 점원으로 취직한 그는 6개월동안 그릇 닦기나 청소 따위의 허드렛일만 했다.

가게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면서 잠이라고는 불 꺼진 오븐 레인지 위에 웅크린 채 서너시간 눈을 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너무 피곤한 날은 채 식지도 않은 오븐에 뛰어올랐다가 화상을 입은 일도 많다.

그러면서도 새벽 네 다섯 시면 일어나 맨 먼저 가게에 나온 뒤 가게문을 닫는 시간까지 마지막 자리를 지키는, 부지런한 견습생이었다. 평생 결근이나 지각 한번 해 본 일이 없었다.

선배들이라고 기술을 가르쳐주는 법도 없었다. 빵이나 과자를 만들 때가 되면 아예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견습생들을 쫓아내고는 했다. 멀찍이 선 채 그는 훔쳐보듯 어깨너머 하나둘씩 기술을 익혀나갔다.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어 다행히 배우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만주를 만들게 된 것도, 처음에는 미리 혼자 계란을 쥐고 손으로 굴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선배들이 밤만주를 만든 뒤 반죽이 조금 남으면 그걸로 나도 한번 해보자 하고서는 눈치껏 한번 두번 실습을 해보는 거예요.

기술이란건 있는 대로 다 가르쳐줘도 배우는 사람에 따라 만든 모양이나 맛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는 건데, 왜 그렇게 숨기고 안 가르쳐주는지 그때 너무나 마음에 사무쳤었어요. 그래서 결심한 게 ‘나는 나중에 돈 벌면 꼭 후배들에게 기술을 아낌없이 가르쳐주겠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운영하고 있는 기술학원이 바로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1964년, 보다 넓은 곳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무연고의 대도시. 그러나 어렵게 구한 첫 일자리에서 성격이 거친 선배를 만나 마음만 다친 채 3개월만에 결국 그만두고 나왔다. 그후 다음 일자리를 얻기까지 약 보름간, 그는 인생에서 가장 길디 긴 시간을 경험했다.

“가진 돈도 한 푼 없고 찾아갈 곳도 없어 그 추운 엄동설한에 완전히 노숙자처럼 살았어요. 하루하루 겨우 목숨만 연명했지요. 그래도 어머니께는, 걱정하실까 봐 그냥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틀림없이 성공할거라고만 했습니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던 풍년제과에 월급 2,000원을 받기로 하고 취직했다. 그런데 한달후 그가 받은 월급은 당초 약속보다 1,000원이 더 얹혀진 3,000원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일만 끝나면 곧바로 빠져나가 놀러다니는 반면, 권씨는 계속 가게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던 모습을 지배인이 소리없이 지켜봤던 것이다.

그에게 가장 자존심 상하는 것은 일솜씨에 대해서 공장장에게 지적을 당하는 것. 절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내내 긴장 속에서 살다보니 85kg이던 체중이 몇 달만에 59kg까지 내려갔다. 게다가 신경성 위장병까지 얻어 3년이나 고생을 겪었다.


행운의 일본유학, 프로의 길로 접어들다

시간이 지나면서 권씨의 기술은 빠른 속도로 쌓여갔다. 그의 남다른 열성과 애착이 낳은 결과다. 카메라가 흔치 않던 시절, 다른 제과점들을 순회하듯 둘러보면서 처음 보는 제품만 있으면 그 가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사진사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어뒀다가 혼자 직접 만들어보고는 했다.

1975년 당시 근무중이던 나폴레옹 제과점의 주인의 배려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게 된 것도 전연 난데없는 행운만은 아니었다. 6개월 과정으로 입학한 일본 동경제과학교, 350명의 학생중 외국인이라고는 권씨 혼자뿐이었다.

이것이 권씨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일본은 제빵제과의 본고장인 유럽은 물론 전세계의 기술이 다양하게 모여있는, 기술자에게는 더 없는 배움의 현장이었다. 특히 현지의 한 제과점에 견습생으로 파견되어 나갔을 때, 마침 본고장중의 본고장으로 손꼽히는 오스트리아의 유명 기술자가 그곳에 와 있었다.

테스트 삼아 권씨에게 뭔가 한가지를 만들어보라고 주문한 오스트리아 기술자. 그 주문대로 권씨가 만들어온 것을 보고 난 뒤, 그 기술자는 그날부터 권씨에게 모든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유학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더 이상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페셔널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1979년 세상에 처음으로 ‘내 가게’를 갖게 됐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 ‘리치몬드 제과점’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사춘기 소년으로 처음 대구의 제과점 점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계획중 하나였다.

그러나 마포경찰서 옆에 위치한 권씨의 제과점은 입지조건상 썩 좋은 출발이 아니었다. 일대가 가난한 동네라 더욱이 권씨가 만드는 고급제과류는 매출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주위의 만류도 아랑곳없이 팔을 걷어 부친 주인 권씨.

누가 뭐래도 빵 맛에 자신이 있었다. 손님들에게 빵을 권할 때도 “맛 없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점차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기 시작해 오늘의 사업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밀려드는 외국 브랜드 속에서도 당당하게 우리 시장을 지켜 온 국산 브랜드로 또 다른 자부심이 있다.

“뭣보다 신속하게 제품개발을 해 온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빵만 맛 있으면 손님은 스스로 찾아오게 돼 있습니다. 손님들을 계속 오게 하자면 싫증을 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새 메뉴를 개발해 내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빵이라도 계속 그것만 먹다 보면 전의 것과 똑같은 빵인데도 불구하고 ‘빵 맛이 갈수록 떨어진다’고 느끼는게 사람 입맛이거든요. 국내에서 곡물재료를 이용한 빵을 저희가 일찍 선보였던 것도 손님들의 기호를 한발 먼저 읽고 준비하는 작업이었지요.

이 일은 그래서 더 어려운 겁니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솜씨라도 무용지물입니다. 몸이 힘든게 아니라 정신이 더 고단한 직업입니다.”

그를 거쳐간 후배들도 많다. 그는 제자 겸 후배들 사이에서 혹독한 선배로 소문나 있다. 실수나 실패가 있을 경우, 말이 아닌 실무 자체로 정확히 문제점을 찾아내 상대를 떨게 만든다. 그의 곁에서 철저하게 배웠던 후배들중 상당수가 전국 곳곳에 흩어진 채 유명과자점으로 독립해 성공했거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요즘도 그는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5시간을 넘지 않는다.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직업상 체력을 위해 매일 아침 약 8km를 달린 뒤 출근하고 나면 매장 4군데를 차례로 순회하며 일일이 작업상황을 점검한 뒤에야 자신의 오전 업무를 시작한다. 웬만한 일은 직원들이 맡아주지만, 조금 만들기 까다로운 빵과 과자는 언제나 권씨 손에서 나온다.

이따금 학원에 나가 기술지도도 맡고, 한편으로는 주변 보육원과 장애인 시설 등에 빵을 지원해주는 일도 4년째 계속하고 있다.


가업있는 맏아들에 ‘흐뭇’

1녀2남의 자녀 중 장남 형준(27)씨가 아버지 권씨의 뒤를 따르고 있다. 현재 일본 유학중인 형준씨가 다니는 학교는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나이에 가난한 청년 권상범이 설레는 가슴으로 찾아갔던 바로 그 제과학교다.

형준씨도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공장에서 그릇을 닦고 잔심부름을 했던 경력이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일본에서 본격적인 기술자 수업을 받기 시작한 얼마 뒤 스스로 가업을 잇겠다는 뜻을 밝혔다.

“저로서는 참 대견하고 고맙지요. 또 아이가 잘 해낼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직업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큰아이도 유학을 간 후 초창기에는 수시로 제게 전화를 걸어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일단 3개월만 견뎌보고 판단하자’고 달랬었습니다.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다행히 그 고비를 잘 넘긴 뒤 이제는 제게 아주 고마워합니다. 일을 배우는 후배들에게도 자주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네가 지금 하는 일을 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의 목표를 위해 공부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네가 지금 하는 일들이 훨씬 부드럽게 돌아갈 거다. 자신이 노동자라고 생각하면 뭐든 값어치 없게 생각된다.

제가 아무 가진 것 없이 출발해 어렵게 기술을 배울 때에도 여태껏 내가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한번도 낙담하는 일 없이 늘 즐겁게 일 할 수 있었던 것도 나는 지금 일이 아니라 공부를 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어요.”

잘 나가는 제과점 사장 권씨는 더 이상 가게를 늘릴 계획도 욕심도 없다. 평생 휴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요즘도 그의 가게는 설날과 추석을 빼고는 연중무휴다. 언젠가 은퇴하게 되더라도 그때는 시골 조용한 마을에 들어가 작은 빵가게 주인으로 빵을 구우며 사는 것이 그의 유일한 노후 설계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적어도 권씨에게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입력시간 2002/10/1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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