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이 향이 묻어난다

위스키의 본고장, 위스키 맛기행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 글래스고에 도착한 것은 9월29일 오후 8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1시간 가량 떨어진 위스키 본고장은 밤 기운에 가랑비까지 겹쳐 다소 쌀쌀한 느낌이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안내인은 차창 밖의 컴컴한 공간을 가리키며 ‘이 곳이 오크통에 담긴 위스키가 숙성되는 저장고, 저 곳은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생산된 원액을 알맞은 비율로 혼합하는 블렌딩 공장…’이라고 설명했지만 어둠 속이라 뭐가 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원액의 차이가 위스키 맛의 차이

본격적인 스코틀랜드 위스키 맛 기행은 ‘증류소’로부터 시작됐다. 증류소는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뜻하는 스카치 위스키의 원액을 만드는 공장. 스코틀랜드 전역에 200여 개가 흩어져 있다. 이들 증류소에서 만드는 원액은 재료와 공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발아된 보리(맥아)만을 사용해 만든 몰트(malt) 위스키와 맥아에 옥수수 등의 곡물을 혼합해 만든 그레인(grain) 위스키다. 몰트는 향과 맛이 강한 반면 그레인은 부드러운 맛과 향이 특징. 국내에서 시판되는 스카치 위스키는 두 가지 원액을 알맞은 비율로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가 대부분이다.

스코틀랜드 서부의 작은 섬 아일라에 있는 라플로이 증류소. 글래스고에서 경비행기로 40여분을 날아 도착한 섬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넓은 구릉으로 형성된 인구 4,000명의 작은 섬은 목초지와 그 위를 한가롭게 거니는 양떼들이 전부였다. 이런 곳에서 위스키 원액 몰트가 만들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해안가에 접한 라플로이 증류소의 책임자인 핸더슨씨는 “위스키 원액은 보리와 물, 숙성통 등에 따라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다”며 “우리는 섬이라는 자연환경이 만드는 신선한 물에다 독특한 방법으로 향을 입힌 보리를 사용해 아일라만의 원액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핸더슨씨에 따르면 우선 보리를 이틀간 물에 담가 발아시킨 다음 1주일 가량 싹을 틔운다. 싹이 난 보리를 잘게 부수기 전에 건조를 시키는데, 대부분의 몰트 위스키는 천연 그대로 건조하는 반면 라플로이 증류소에서는 독특한 향기를 덧씌운다. 목초지에서 채취한 이탄(泥炭)을 태워 나온 향을 보리에 입히는 것. 풀을 태우는 듯한 이 향기는 라플로이에서 만든 위스키 원액에서도 그대로 맡을 수 있다.

이후 잘게 부숴진 보리는 발효통으로 옮겨져 물과 효모와 만나 발효 과정을 거친다. 충분히 발효된 발효액은 황동색의 깔데기를 뒤집어 놓은 듯한 증류기를 통해 위스키 원액으로 세상에 나온다. 7개의 증류기가 있는 증류공장에서는 위스키의 달콤한 향기보다는 진한 누룩의 냄새가 가득했다.


향과 맛의 결정체, 숙성통

맥아를 만들어 분쇄ㆍ발효하는 공장과 증류기가 가득한 공장건물 외에 라플로이 증류소에는 낡고 자그마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핸더슨씨는 ‘숙성 창고’라고 설명했다. 창고 안에 있는 수백개의 오크통에는 라플로이 증류소에서 갓 생산한 몰트 위스키 원액이 담겨 있었다. 그는 “위스키 원액은 무색이지만 숙성통에 담겨져 색깔이 입혀지게 된다”며 “위스키 향의 40%도 숙성통이 좌우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스카치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오크통은 미국산 참나무(오크)를 사용하지만 스페인산 참나무로 만들어진 쉐리통도 가끔 이용된다. 미국산 오크통은 애초 켄터키주에서 생산되는 버본위스키를 숙성시키기 위해 만든 것인데, 미국에서 한번 사용하고 버린 오크통을 스코틀랜드에서 수입해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크통은 3~4번 사용한 뒤 폐기된다.

오크통은 위스키 원액에 담겨진 거친 맛을 흡수하는 대신 오크통이 지닌 바닐라 향과 맛을 원액에 공급한다고 한다. 오크통은 사용하기 전에 불에 굽는데, 이 과정에서 활성탄층이 만들어져 원액에 함유된 좋지 않은 향을 제거한다.

밖으로 나온 핸더슨씨는 공장 앞으로 펼쳐진 넓은 바다를 가리키며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도 위스키 원액에서 음미할 수 있다”는 말을 던졌다. 믿기지 않았지만 실제 라플로이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몰트 위스키는 이탄의 독특한 향과 함께 소금기의 강한 맛이 특징이라는 것.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크통이 그 비결이었다. 나무로 된 오크통은 ‘살아 숨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공기투과성이 높아 숙성창고 주변의 외부 공기가 원액의 향과 맛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스카치 위스키를 증류소의 위치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료로 사용되는 보리나 물도 위스키 맛을 좌우하지만 숙성단계에서 어떤 공기가 스며드느냐에 따라 위스키 맛과 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생산되는 ‘하이랜드 몰트’는 짙고 맛깔스러운 가을 향을 담고 있으며 남부의 ‘로랜드 몰트’는 깔끔하면서 순한 봄꽃 향, 북동부 스페이강 주변의 ‘스페이사이드 몰트’는 우아하고 달콤한 여름꽃 향, 아일라섬의 ‘아일라 몰트’는 풍부하고 짠 듯한 강한 맛으로 분류되고 있다.


싱글몰트가 위스키의 순수령

스코틀랜드에서는 원액인 몰트를 그대로 숙성시킨 뒤 병에 넣어 출시하기도 한다. 이를 ‘싱글 몰트위스키’라고 하는데, 국내에도 시판 중인 ‘글랜피딕’이 대표적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 브랜드, ‘발렌타인’을 출시하는 얼라이드 도멕사의 홍보담당자인 케네스 린지(42)씨는 “한국에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주종을 이루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적어도 14년 이상 숙성된 싱글몰트를 최고의 위스키로 친다”고 말했다.

싱글몰트는 보리의 순수한 맥아만을 사용해 정성스럽게 빚는데 반해 블렌디드 위스키는 싱글몰트에 ‘싸고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그레인 원액을 혼합했기 때문이다. 라플로이 증류소는 자신들이 생산한 싱글몰트 위스키 ‘라플로이’를 ‘황태자의 위스키’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1994년 이 증류소를 방문한 찰스 황태자가 그 맛에 반해 ‘왕실위스키’ 증서를 증정했다는 것. 핸더슨씨는 “왕가의 인정을 받은 몰트 위스키는 라플로이가 처음”이라며 “황태자가 지방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어떤 술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식사 전에는 드라이마티니를 마시고 식후에는 15년산 라플로이를 마신다’고 대답해 라플로이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감귤도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본고장에서 아무리 최고로 치는 위스키라도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맞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을 뿐이다.


‘위스키의 신비’ 블렌딩

덤바튼에 있는 얼라이드 도멕사의 보틀링(위스키를 병에 넣는 작업) 공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실려온 오크통을 쌓아둔 창고 건물.

증류소나 저장시설에서 적어도 3년 이상 숙성된 원액을 담은 오크통들이 수천 개나 쌓여 있었는데 동행한 홍보담당 켄 린지씨는 “위스키 원액이 가득찬 통은 거의 없고 심지어 어떤 것은 절반밖에 담겨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오크통의 원액은 매년 2%가량씩 자연 증발하?바람에 17년산의 경우, 실제로 절반은 증발하고 나머지는 공기로 채워진다는 설명이다. 바로 옆 칸에서는 오크통에서 뽑은 원액을 3만5,000리터 짜리 거대한 원액통에 모아 ‘위스키의 신비’로 불리는 블렌딩 작업을 하고 있었다.

블렌딩은 서로 다른 몇 개의 증류소에서 생산된 그레인과 몰트위스키를 혼합하는 것. 위스키 제품 한가지를 만드는 데 적게는 10가지에서 많게는 50가지의 원액을 배합하는데, 몰트와 그레인의 배합 비율은 마스터블렌더가 결정한다.

그래서 위스키의 맛과 향은 마스터블렌더의 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액통에 든 10여개 원액은 마스터블렌더가 결정한 배합비율에 따라 자동으로 혼합돼 파이프 라인을 통해 보틀링라인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자동으로 병을 채운다.

지난 한해 이곳에서 출고된 위스키는 발렌타인과 임페리얼 등 모두 1,450만상자(750㎖짜리 12병 기준). 올해는 1,600만 상자를 생산할 계획이다. 판매담당 짐바 이사는 “발렌타인 17년 산의 경우 지난해 16만상자를 생산했는데, 그 중에서 무려 6만 상자가 한국으로 나갔다”고 설명했다.

위스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위스키를 좋아하는 기질에서 보면 스코틀랜드나 한국은 형제국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과연 그 말이 진심일까?

덤바튼(스코틀랜드)=김정곤 기자

입력시간 2002/10/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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