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애들과 말싸움해서 이겨야 진짜 영어"

영어 에듀테인먼트 인기 강사 문단열

모창 가수 나훈하가 나와 미국 가서 팝송 ‘I Can’t Stop Loving You’를 부르다 발음이 꼬여 창피당한 이야기를 한다. 함께 참가한 사람들이 나무 젓가락을 두드리며 이날의 주요 표현 문구를 뽕짝식으로 부른다. 애니메이션은 물론 갖가지 타악기가 동원돼 한국인에게 영어를 ‘실감’시킨다.

“영어 강의 15년 동안 꿈꿔 왔던 에듀테인먼트(교육+오락)를 처음으로 달성했다는 성취감으로 뿌듯합니다.” 8월 26일 첫 전파를 탄 EBS-TV의 영어 회화 프로 ‘잉글리시 카페’의 진행자 문단열(38)씨가 시청자들의 높은 호응에 감사하는 것은 이 자신의 프로에서 성공했다는 단순한 성취감 때문만이 아니다 .

8월 26일 첫 전파를 탄 이래 현재 방송사의 효자 프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 프로의 중심에 그가 있다. 여타 TV방송의 9시 뉴스 시간대인 9시 30분~9시 50분과 겹친 탓에 처음에는 시청률 0.3%로 출발했으나 호응이 높아 가더니 얼마 안 돼 1%선을 넘긴 프로다.

EBS 최대의 히트작 ‘도올 강의’의 시청률(1.5%)에 맞먹는 수준이다. 지금 추세라면 2~3% 넘기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전망이다. 간단한 밴드 음악을 배경으로 그가 개그맨들과 주고 받는 농을 즐기고 있노라면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린 20분이 아쉽다.

이로써 그는 학원가에 널리 통하는 이른바 ‘밤무대 가수’를 탈피한 것이다. 방송에는 나가지 못 하고 학원에서만 활동하는 선생을 일컫는 은어다. 그러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번의 경우, 방송쪽이 아쉬웠다는 사실을 안다.


영어에 미쳤던 학창시절

‘미국놈들과 말싸움 해서 이길 때까지 영어 공부 하겠다.’

지금은 영어 회화 교육 포털 사이트 업체인 ㈜펀글리시(www.funglish.com)의 대표 이사인 문씨가 영어에 공을 들이게 된 데는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다. 영어는 사춘기의 그에게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고교 3년은 곧 영어에 미쳐 있던 세월이었다. 영어와 무관한 수학이나 과학 같은 시간에는 영어 책을 숨겨 가며 공부하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영어 선생 될 생각은 없었다. 대전에서 초ㆍ중 시절 바이올린을 배우던 그는 목사집에 돈이 어디 있느냐는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음악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번에는 성악가가 되려는 생각으로 부모 몰래 목을 단련시켜 가던 고교 2학년의 그에게 축농증이 덮쳤다. 음악가의 꿈은 그것으로 종을 쳤다.

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영어가 그를 불렀다. 고교 시절 내내 그는 영어만 공부했다. 수학이나 화학 시간 등 학교에서 소문 난 엄한 교사의 시간에는 책을 숨겨 가며 영어를 파고 들었다. 수학 교사는 그를 끌어 내 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국 영어 웅변 대회에서 1등을 따 오는 그에게 영어를 걷어 치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해 목사인 부친의 뜻을 따르는가 싶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중 3때 초등학생에게 과외를 해 번 돈 8만원을 모두 영어 배우는 데 쓸만큼 영어에 미쳐 있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미국 선교사의 자식들한테 영어를 배우는 댓가로 시간 당 4천원씩을 지불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꿈 많은 사춘기를 영어 공부에 몰두했을까?

“영어에 자신감을 가지면 인생 전반적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는 한국인

특성을 일치감치 간파한 거죠.” 한ㆍ중ㆍ일 3국 중 왜 한국이 유독 극성일까? 그의 해석이 상당한 설득력을 띠고 다가온다.

“중국의 경우 문화대혁명으로 영어가 엄청나게 핍박을 받아 하향 평준화를 이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최근 개방 정책으로 12억이 갑자기 해방되자 모든 사람의 화두가 돈 그리고 영어로 된 거죠.”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은 영어에 굳이 목 맬 필요가 없어요. 일본에서는 토익 점수가 참고 자료일 뿐이죠.”

흔히 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영어 잘 하는 민족’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일본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돌려 말한 돌려치기 어법(다데마에)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영어가 되더라도 선뜻 영어로 말하지 않는 특유의 눈치보기 문화탓도 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시절 일어는 고급, 중국어는 일상 회화 수준을 마스터한 그의 비교는 상당한 설득력을 띠고 다가 온다.


괴짜강사 문 PD

그는 대학 4학년때 미국인에게 처음으로 이겼다. 물론 영어로 한 말싸움에서. 미국인도 포함돼 있던 고급 영어 회화반에서 ‘미국의 대테러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선교사 캠프에서 벌어졌던 영어 토론 시간이었다.

그는 타임, 뉴스 위크 등 구할 수 있는 시사 주간지들은 모두 입수해 A4 용지 6장 분량으로 정리해 머릿속에 넣었다. 선교사촌에서 가졌던 토론 당일 자신의 논리 정연한 영어에 밀린 미국인은 “OK, OK”를 연발하며 궁지에서 벗어나려 했고 이 기억은 그에게 무한한 힘을 불어 넣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87년 민병철 영어 학원 회화 교사를 거쳐 1989년 연세대 앞에 ‘한솔 어학원’을 설립, 영어 교육에의 꿈을 키우게 된다. 1991년 강남 김성호 학원 부원장을 맡은 그는 1994년 자신이 첫 설립한 ‘노토 어학원’에 이어 1999년 12월 현재의 회사를 차리게 된 것이다. 평소 가수 조 PD를 좋아하던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문 PD’로 소개, ‘괴짜 강사 문 PD’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의 EBS 입성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미 학원가에서 재치 있는 명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8년 동안 그에게 EBS의 교섭이 있었다. KBS 위성 방송의 ‘영어 발음 특강’, 케이블 TV 재능방송의 ‘김치 발음에 버터를 발라주마’ 등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EBS의 경우 막판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유학도 못 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번 네번째의 경우는 당하고 있을 수만 없었다. 이미 세 번이나 덴 경험이 있던 그는 “확정되거든 부르라”고 먼저 일침을 놓았다.

뜻밖의 반응에 고심한 방송국측은 몇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현재의 프로 형태는 교수급 강사와 함께 진행하는 방안, 어느 한 코너만 맡기는 방안, 연예인과 붙이는 방안 등을 놓고 그와 검토한 끝에 이번 작품이 만들어졌다.


예술과 어학, 공연과 교육의 만남 실현

특수 방송국이라는 사정상 시청자층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안다. 출연료는 없고 이른바 거마비뿐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있다. 일반 불특정 다수 시청자가 아니라 목적 시청자들한테서 주목받고 있다는 뿌듯함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KBS나 MBC 같은 대형사의 방송을 맡았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진짜 프로 밴드와 댄서 등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럴 경우 예술과 어학의 만남, 공연과 교육의 만남이라는 자기 본래의 의도가 충실히 펼쳐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현재 그의 ㈜펀글리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빠다를 발라주마’ 등 영어 회화 관련 36개의 온ㆍ오프 라인 콘텐츠로 독자들을 즐거운 영어 세계로 유인하고 있다. 동갑내기 부인 김애리 역시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영어를 전공(연세대 영문과)한 부인은 2002년 8월 ‘영어 일기 무작정 따라 하기’를 발간, 영어 관련 도서 시장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0/2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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