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박인수(下)

1975년 박인수는 대마초파동에 연루돼 활동금지의 족쇄를 찼다. 그는 “대마초는 1970년 초 20일 정도 피우다가 대연각 호텔 육교 위에서 던져 버리고 그 후 왜관의 미군부대에 나갈 때 제일 독한 월남제 대마초를 마지막으로 피우고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보적인 그의 독집음반들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발매금지가 되는 고통이 이어졌다. 설상가상 첫 부인이 이혼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려 가정도 깨져 버렸다. 자유분방했던 그는 좌절감에 공연펑크를 일삼고 잠적해 버리는 외톨박이로 변해갔다.

당시는 김추자도 노래할 때의 묘한 손짓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곤혹을 치렀을 만큼 반공정신이 드높았다. 홀로 서울 원효로에서 살던 박인수는 몇 번씩 간첩으로 오인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집에서 릴 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노래하기 위해 헤드폰을 끼고 있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매일 본 마을주민들이 비밀 무전을 하는 것으로 착각해 ‘영어를 잘하는 수상한 간첩’으로 신고를 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당시 박인수는 외모 때문에 ‘블루스 박’으로 불렸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날 단성사에 이소룡 영화 정무문을 보러 갔다. 길게 줄을 선 관객들 끝에 서 있는데 암표를 팔던 장사꾼이 “이소룡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소리치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박인수는 “극장에서 내 얼굴을 보더니 무료입장을 시켜 주었다”고 웃는다. 1982년 두 번째 결혼을 해 아들을 낳는 등 가정을 꾸렸지만 여대생들과 어울려 다니자 두 번째 부인도 호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1980년 해금이 된 박인수에게 검은나비의 기타리스트였던 김기표가 음반작업을 제의해 왔다. 불후의 명곡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라는 독집 음반이 탄생했다.

박인수는 “1980년대에는 이은관이 장고를 치고 거문고에 픽업을 달아서 성주풀이를 방송에서 부르기도 했다. 이은관이 창을 불러 보라 하여 연습해보니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별 차이가 없었다. 흑인들의 한스런 창법은 우리 판소리와 통하는 면이 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정착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지방극장가의 쇼 무대를 전전하며 선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신세로 전락해 갔다.

1987년 8월 이정선, 엄인호가 주축이 된 신촌블루스와 인연을 맺으며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에 함께 나섰다. 신촌블루스의 세션으로 7분40초의 롱버전 <봄비>를 열창하자 “역시 박인수”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재기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1988년 KBS TV 젊음의 록 콘서트와 1989년 KBS TV 연예가 중계에 한영애와 하사와 병장 출신 이경우와 함께 출연을 하는 등 방송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 데블스의 리더였던 연석원과 선배가수 김준이 음반제작을 제의해 와 마지막 독집이 된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텐데>를 의욕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잠적해 버리는 무책임한 방랑벽이 다시 꿈틀거리며 스스로 음악무덤을 팠다. 출연펑크를 일삼는 박인수에게 출연업소인 홀리데이 인 서울은 해고 통고를 했다. 노래외에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던 그는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가요계의 미운 오리로 전락했다. 1994년 MBC주부가요열창에서 출연요청이 왔다.

하지만 방송출연을 위해 목욕을 하던 박인수는 저혈당으로 쓰러져 연세대 세브란스 응급실로 실려간 이후 가요계에서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가수에서 목사로 변신한 윤항기의 선교원에 기거하던 박인수는 1998년 겨울 이경우가 운영하는 속초 블루노트 재즈클럽에 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경우는 주유소, 영어학원, 지역의 야간업소, 무의탁 노인들이 머무는 양로원 등에 취직을 주선해 정상적인 생활인으로의 터전을 마련해 주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2000년 가을 서울로 떠나간 박인수에 대해 “객사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나돌았다. 그런 그가 2002년 봄 생과 사의 기로에서 허덕이는 병자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자신들의 음악영웅의 처참한 모습에 가수 임희숙과 이경우는 7월 9, 10일 이틀 동안 등촌동 88체육관에서 <리멤버 박인수>라는 박인수돕기 모금공연을 가수분과위 주최로 열었다. 그를 돌보던 일산 행복의 집 정봉인 목사는 수술 전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의 재회도 주선했다.

박인수는 “나는 헛 살았다. 돈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제는 음악 자체가 허무하다. 내 육신에서 받아들일 만한 노래가 없었다. 나를 아직도 기억해주는 팬들이 있어 고맙지만 정신이 엉뚱한데 가 있어서 내 음악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는 “요즘 아이들 노래는 거의 댄스음악이고 랩인데 엉터리다. 스텝이나 창법이 오리지널 랩이 아니다. 예전에 방송국에서 만난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다”며 후배 가수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요즘 가수 중에는 신효범의 창법이 독특해. 옛날로 보자면 김추자 급”이라고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수술 후 건강을 다소 회복했지만 온전한 상태가 아닌 박인수는 불우한 성장환경으로 뒤틀려 버린 황폐한 삶을 이겨내지 못한 한국전쟁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소울 가수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입력시간 2002/10/3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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