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정정당당을 갈망한다

텔레비전 드라마 ‘야인시대’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신드롬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시청률은 이미 50%를 넘어섰으며, 어느 자리를 가든지 대통령 선거와 ‘긴또깡’이 화제에서 빠지지 않는다. 당연히 인터넷에서도 새로운 유머의 소재로 사랑을 받고 있다.

야인시대의 제목을 패러디한 ‘야한시대’로 에로영화를 찍어 볼 것을 권고하는 짓궂은 네티즌이 있는가 하면, “김두한과 구마적의 대결에서 김두한이 쓰러졌을 때는 김좌진 장군이 나오는데 왜 구마적이 쓰러졌을 때는 마적 아버지가 나와서 '일어나라 마적아' 하지 않느냐”며 귀엽게 항의하는 네티즌들도 있다.

야인시대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연말의 대통령선거와 맞물려 혼탁하게 돌아가는 정치판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환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올해 6월 우리는 태극전사들의 모습 너머에서 정정당당한 사회의 모습을 보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국민들이 보았던 것은 욕설과 음모론이 난무하는 상호비방과 이전투구뿐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야인시대의 건달들은 페어 플레이의 화신들이다.

그들은 맨손으로 싸워서 승부가 나면 깨끗이 승복한다. 시정의 건달들은 결코 승리를 구걸하지 않는다.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가던 쌍칼, 신마적, 구마적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던가.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야인시대에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심정적인 차원에서나마 현실의 결핍을 보상을 받고자 한다. 국회에 분뇨를 뿌리던 김두한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국민 대다수의 감정을 대변하는 동시에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게 했던 최고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야인시대를 보면서 시정의 건달만도 못한 국민의 대표들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나마 격렬하게 조롱하고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야합과 협잡이 판치는 더러운 시절에 어찌 주먹의 순수성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드라마 자체만 놓고 보면 야인시대는 기대 이하의 범작(凡作)에 불과하다. 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은 ‘용의 눈물’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을 집필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선 굵은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야인시대는 이환경의 드라마가 자기복제의 단계에 고착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드라마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다. 배경은 수많은 영웅들이 명멸하며 혼란을 거듭하는 춘추전국시대여야 한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며 영웅을 통해서 난세는 극복된다는 영웅 대망론이 이환경 드라마의 핵심 코드이다.

따라서 영웅을 갈망하고 예견하는 예언자들이 그의 드라마에는 수도 없이 등장한다. 고승들은 거의 대부분 예언자들이며, 특히 태평 군사나 최지몽은 미래를 선취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야인시대에서는 꿈이나 환상 속에서 등장하는 김좌진 장군이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사이다.

궁예에게는 종간, 견훤에게는 최승우, 왕건에게는 최응, 고려 광종에게는 이몽유·장단설·유신성, 김두한에게는 김영태 하는 식으로 여영웅과 책사가 짝지워져 있다. 그리고 영웅의 도덕적 정당성은 국민들로부터 나온다. 전제군주임이고 거리의 건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웅들은 민주적 가치의 신봉자들이다.

하지만 싸움과 살육을 통해서 권력을 강화하고 집중하는 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싸움이 정작 국민들을 위해서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야인시대를 보면서 상당히 께름칙한 것은 김두한이라는 인물의 형상화 방식이다. 실제의 김두한이 이러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잘못 그려졌다 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혈통의 신화가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거리의 아이 김두한에게서 최소한의 양아치적인 속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어느 네티즌이 지적한 것처럼, 맨날 극장을 기웃거리다가 죄 없는 사람을 때려서 연극배우 황철에게 걸려서 혼나던 김두한의 모습을 야인시대가 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야인시대의 김두한을 두고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싸움 잘 하는 모범생에 불과하지 않은가.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에 비하자면 몇 발자국 퇴보한 형국이다.

시청률로 대변되는 대중의 관심과 드라마의 질적인 차원은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금 처지는 드라마지만 그 속에는 의협(義俠)이라는 가치가 빛나고 있는 것을. 더러운 정치현실 속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입력시간 2002/11/01 15:3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