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신화의 종언] "386은 갔다"

민주화 목표 실종 노선·이념서 사분오열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386세대’가 소멸되고 있다.

동(同) 시대를 살아온 계층 중 다른 세대와는 달리 유난히 집약적인 목소리로 정치ㆍ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던 386세대가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지고 있다.

386 세대란 30대의 연령에 1980년대 대학교 학번, 그리고 60년대에 출생한 사람들. 컴퓨터 성능에 따라 매겨지는 ‘386’ 이란 용어가 연령층에 대입된 90년대 후반에는 61년생(대학교 80학번)에서 69년생(88학번)까지가 모두 30대에 해당됐다. 이 때만해도 386세대는 곧 30대 전체를 통칭하는 한편, 지난 시절 군사정권과 맞서 싸운 민주화 세력의 중추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 386이 486으로 진보(?)되면서 ‘패기의 30대’들도 하나 둘 가정을 책임지는 ‘중년의 40대’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64년생까지가 불혹(不惑)을 넘보는 나이가 되다 보니 당초 386으로 지칭된 세대의 거의 절반 가량이 자연적인 퇴장을 강요받은 셈이다.

세월만 변한 것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이란 한 울타리 안에서 고락을 함께 해온 그들이지만 YS, DJ 정권의 출범과 함께 단일 목표가 실종되면서 사상과 노선, 이념체계 등에서 이견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던 이들은 대다수 제도권인 정계로 진출했으나 여기서부터 핵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으로 갈리더니, 이젠 정몽준 의원의 통합 21과 민주노동당 등으로 또 쪼개지는 양상이다. 특히 386세대의 대표급 주자인 민주당 김민석 전 의원이 진보ㆍ개혁 성향의 노무현 후보를 등지고 통합 21로 옮기면서 386세대의 혼란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정계진출로 핵분열 가속화

역사적으로 386세대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지대했다. 80년대에는 학교를 나와 화염병을 들고 군부 타도를 외쳤고, 90년대 들어 군부 종식과 통일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YS의 문민정부 출범과 역사적인 첫 정권교체라는 전과(戰果) 뒤에는 이들 386세대의 단합된 힘이 있기에 가능했다.

비록 대다수가 투쟁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더라도 리더 격인 386 출신 정치인들의 움직임에 한 목소리로 지지를 보냈으며, 이렇게 형성된 공감대가 많은 국민의 성원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민주화 쟁취라는 역사적 소명을 다한 탓일까.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家長)의 위치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절박해진 탓일까. 지금의 386은 풍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완전히 사분오열 되고 있다.

아직은 구 민주화 세력의 본당 격인 민주당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은 편이지만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에 합류한 이도 있고, 선명성을 내세워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측에 가 있는 이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김민석 전 의원을 비롯한 일부 세력이 정몽준 의원 주도의 통합 21에 합류하기도 했다.


정치권과 정치권 밖의 386

현재 한나라당에는 원내 인사로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김영춘 의원(서울 광진 갑)과 서울대를 졸업하고 검사생활을 거친 뒤 정계에 입문한 원희룡 의원(서울 양천 갑)이 386세대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원외에는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고진화 (서울 영등포 갑),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오경훈(양천 을),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정태근(성북 갑)씨 등도 있다.

또 자민련에서 출발해 한나라당에 정착한 서울대 학도호국단장 출신의 심양섭씨와 이해식 서울시의원 등도 386세대의 일원이다. 연령적으로는 남경필(경기 수원 팔달) 이승철(서울 구로 을) 오세훈(서울 강남 을) 윤경식 의원(충북 청주 흥덕)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보다 운동권 원로격으로 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의원(경기 안양 동안)과 같은 서울대 출신의 김부겸 의원(경기 군포),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이성헌 의원(서울 서대문 갑) 등이 정신적 지주격이다.

구 야당의 뿌리가 지지 기반인 민주당에는 386 세대가 조금 더 풍성하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거친 송영길 의원(인천 계양)과 전대협 의장 출신의 임종석 의원(서울 성동)이 원내에 진입해 있으며, 서울대 출신 김성호(서울 강서 을) 고려대 출신 원유철 의원(경기 평택 갑) 등도 386세대에 속한다.

원외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허인회(서울 동대문 을),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의장을 역임한 이인영(서울 구로 갑),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부의장을 지낸 우상호(서울 서대문 갑)씨 등이 있다.

또 전대협 2기 의장 출신의 오영식(민주당 비례대표 예비후보)씨와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거친 이성호 전 서울시의원(민주당 선대위 기획위원) 등도 지근거리에서 노무현 후보를 돕고 있다.

창당을 앞둔 국민통합 21에는 인적 구성이 아직 체계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김민석 전 의원과 서울대를 졸업한 홍윤오 공보특보, 자민련에는 고려대 출신의 정진석 의원(충남 공주)이 범 386세대에 속하며, 민주노동당에도 권영길 후보를 따르는 ‘왕년의 대표급 주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386세대를 대표하는 운동권 출신 간부 중에는 정치권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둔 채 생업에 종사하는 ‘평민’도 상당수에 이른다. 선거 때마다 줄곧 이름이 거명되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이정우씨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전대협 조국통일추진위원장 출신의 김중기씨는 영화계에서 활동 중이다.

전대협 간부출신의 정명수씨는 사업가로 변신했고, 전대협 조통위 위원장을 지낸 전문환씨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 전대협 의장 출신인 태재준씨는 미국유학중. 이밖에 전대협 이후 학생 운동을 주도한 한총련 출신들은 사회 초년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직 이렇다 할 활동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정치구습에 물들며 신선미 잃어

386세대가 제도권에 진입을 시작한 것은 96년 15대 총선 때부터. 당시 김민석 의원이 386 국회의원 시대의 서막을 열었으며,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무려 30여명이 국회의 문을 두드려 이중 10여명이 ‘배지’를 달게 된다. 거리의 전사(戰士)들이 당당히 활동무대를 정치권의 심장인 국회로 옮기게 된 것.

비록 이들은 3개 정당으로 나뉘어 출발했지만 당별로 386 주축의 젊은 의원 모임을 만들고, 또 당을 뛰어 넘어 386 의원들만의 조직을 구성하는 등 기성 정치인들과는 차별화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386 정치인들이 정치변혁의 중심에 서서 관습에 얽매인 정치판에 새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그들도 곧 제도권이란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들 듯 신선미를 잃어가면서 선배 정치인들의 행태를 답습하기 시작했다.

2000년 4월 청와대로 16대 총선의 민주당 낙선자들이 초청된 자리에서 허인회씨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악수대신 넙죽 큰절을 했다. 이를 놓고 당내 386 인사들도 “새 정치 주도세력이 권위주의적인 예법을 보인 것이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당연히 외부에서는 실망과 함께 탄식이 쏟아졌다.

386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사건은 민주당 소속 원내외 위원장들이 2000년 광주 5ㆍ18 전야제 참석 이후 가진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이곳에 동석한 임수경씨가 “386 정치인들이 광주항쟁의 뜻을 기리는 행사에 참석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는 곧바로 룸살롱으로 자리를 옮겨 여종업원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고 도덕적 해이를 꼬집었다.

이 폭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각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386이라는 상품성에 매몰돼 80년대의 시대정신을 잊어버렸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잃어버린 나이만 어린 기성 정치인” 등의 비난이 빗발쳤다.

사건의 주인공들이 적극 해명에 나섰지만 오래도록 진화되지 않은 채 386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시들기 시작했다. 광주 술판에서 촉발된 국민의 비난은 각 정당 소속 386의원 전원에게 돌아갔고, 그들도 평범한 또 하나의 정치인 그룹으로 국민의 머리에 각인하게 됐다.


386 해체 물꼬 튼 김민석의 변신

올해 들어 민주당이 국민경선을 통해 개혁과 진보성향의 노무현 후보를 선출하자 당내 386 의원들은 다시 힘을 결집한다. 뚜렷한 방향타가 없던 이들이 새로운 구심점을 만난 셈이다. 물론 한나라당과 자민련 소속 의원들은 옛 동료이던 민주당 386 의원들에게 정면으로 화살을 겨누고 일전을 벌일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386 정치인들은 또 다른 세포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일부는 후보단일화를 명제로 한 반노파에, 일부는 중도에 서며 노 후보 지지 세력과 벽을 쌓게 됐다.

결정적으로 김민석 전 의원이 국민통합 21로 훌쩍 날아간 것은 ‘386 해산’이란 역사적 사건의 ‘화룡점정’격이 되고 말았다. ‘혈맹’과 같은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원수지간으로 급변한 것. ‘386도 이제 끝났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386 대표주자들의 분열은 일반 386세대에게도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됐다. 실제 30대의 표심은 주간한국의 10월 여론조사결과, 정 의원이 33.8% 노 후보 28.0% 이회창 후보 23.8%로 3등분하고 있다. 20대에서도 정 의원이 38.4%로 조금 앞서갈 뿐 노 후보와 이 후보는 똑같이 19.4%를 나타냈다. 대중 속 386 들도 리더들만큼 한 곳으로의 힘 결집이 어려워진 것이다.

현 상황을 놓고 한 386 정치인은 “비록 지금은 각자가 선택한 방법론의 차이가 있지만 커다란 틀에서 보면 목적과 지향하는 바가 같기 때문에 곧 하나의 응집된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말은 곧 그들이 그토록 거부하던 기존 정치인들의 독선적 외침과 너무나 닮아 있다. 민주화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386세대들도 경제논리와 지역갈등, 정치적 노선이란 제 각각의 이해 속에 뿔뿔이 흩어져 가고 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2/11/01 16:03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