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장학생 기업 "왜 이렇게 춥냐"

대선 앞두고 재계 ‘DJ장학생’ 바늘방석 신세

“정부는 구조조정 성과에 따라 기업을 아낌없이 차등 지원할 것입니다. 한 발 앞서 개혁한 기업이 잘했다고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정부는 돈 벌 수 있는 기업, 외화를 벌 수 있는 기업만 도울 것 입니다.(김대중 대통령)”

1998년 10월29일 청와대 만찬석상. 김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1년 만에 조기 극복하는데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 한화와 두산 그룹 등 구조조정 모범기업 대표 13명을 초청, 이들 기업 대표들을 직접 칭찬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눴다.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이 자리에 참석한 한화 김승연 회장은 김 대통령의 바로 오른편에, 두산 박용오 회장은 맞은 편에 각각 앉아 대통령의 말 한 마디, 숨소리 조차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날인 10월30일 한화와 두산 그룹 계열사들의 주가는 대부분 가격제한 폭까지 치솟는 등 일제히 초강세를 보였다.

김 대통령의 ‘아낌없는 지원’ 발언은 가을 단풍 빛 마냥 이들 주가를 빨갛게 물들였다. 기업의 주가는 실물경기의 선행지수로 시장에 우선돼 반영된다는 속설처럼 주류업계의 거산(巨山) 두산 그룹은 2년 후인 2000년 12월 국내 기계분야의 간판기업인 한국중공업을 인수, 자산규모 11조원 대의 재계 10위로 우뚝 쏟았다.

한화 역시 시기적으로 다소 지체 됐지만 창립 50주년을 맞은 올해 10월 ‘오매불망’ 대한생명 인수자로 선정되면서 금융그룹으로 변신을 예고했다.

그러나 청와대 만찬 이후 4년의 세월이 흘러 대선이 1개여 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한화와 두산 그룹은 정치권에서 밀려오는 검은 먹구름을 의식, 대선정국 풍향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바늘방석에 앉은 듯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화 대생인수에 의혹의 시선

그것도 그럴 것이 소위 ‘DJ 장학생 기업’에 대한 정치권의 포격이 지난 국회 국정감사에서부터 서서히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한화의 대생 인수가 결정된 다음날인 9월24일 국회 정무위 국감에서 국정원의 ‘도청 자료‘라는 문건 세 장을 흔들며 “한화가 대생을 인수하기 위해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를 동원하는 치밀한 로비를 벌여 특혜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최근 정국을 들쑤시고 있는 ‘도청 파문’의 첫 번째 케이스로 한화가 타깃이 된 셈이었다. 청와대와 한화는 즉각 ‘사실 무근’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전날 갑작스럽게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통과시킨 ‘한화의 대생 인수 결정’을 놓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던 여론은 특혜 시비로 들끓었다.

재벌이 대형 생명보험사 인수로 인한 각종 부작용은 차치해도 한화 자체에 대한 자격 시비는 분명 논란의 대상인 셈이다.

10년간 단 한 해도 흑자를 낸 적 없고 지난해엔 5,808억원이란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한 한화(자산규모 11조4,000억원)가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지만 지난해 8,000억원이 넘는 당기순익을 내고 자산규모만도 한화의 두 배가 넘는 대생(26조1,000억원)을 과연 어떻게 인수할 수 있느냐는 것이 특혜의혹의 진상이다.

이율국 한화 구조조정본부 이사는 “해외 유수 전문컨설팅 업체가 대생의 최근 실적 호전에 맞춰 두 차례나 매각기준을 바꿔가며 철저하게 실사를 거친 국제경쟁입찰을 ‘특혜’로 폄하하는 것은 정치권이 스스로 ‘얼굴에 침 뱉기’하는 행동”이라고 강력히 반박했다.

이 이사는 “다음정권에서 청문회를 열든 어떠한 재검증 과정이 닥치더라도 우린 떳떳한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몸 낮추고 우호세력 결집에 나선 한화

10월28일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예금보험공사와 대생 인수 본 계약을 맺은 한화는 잔칫집 분위기 라기 보다는 오히려 평소보다 바짝 몸을 낮춘 채 정적과 긴장감만이 빌딩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최근 창업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예정했던 대규모 기념행사 마저 모두 취소한 한화는 본 계약을 앞두고 시민단체와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 대생 인수 특혜의혹에 신경을 곤두세운 경직된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나 본 계약이 이뤄진 이날도 정작 주인은 자리를 비운 채 축하행사도 열지 않았다. 한화가 코리안 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와는 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김승연 회장은 경제통상대사 자격으로 “미국 방문 중”이라는 비서실의 냉랭한 반응뿐이었다. 김 회장은 환란 직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기업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소유주의 사재출연을 요청하자 즉각 사재를 담보로 잡히고 기업 운영자금을 마련한 첫번째 재벌 회장이다.

또 외교가에서 미 공화당 정치인들과 가까운 미국 통으로 철강 및 자동차 등 주력 수출품목에 대한 대미통상압력 문제와 대북 정책 등에서 DJ정부와 조시 W 부시 정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회장의 이 같은 면면을 놓고 한화의 대생 인수를 DJ정부의 특혜로 단정짓기는 다소 무리라는 지적도 높다.

한화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몽준 ‘국민통합21’ 신당추진위 대선후보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각별한 사이인 김 회장은 서울 용산구 4선 출신인 서정화(전국구ㆍ국회 통일외교통상 위원장) 한나라당 의원의 맏사위라는 점 역시 정치권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두산 특혜 공방…고개드는 ‘강압빅딜’

정몽준 대선후보의 지지도가 높아지면서 내년 2월이면 민영화 2주년을 맞는 두산중공업(구 한국중공업)의 독점폐해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고조되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서 1999~2000년 발전설비 부문에 대한 빅딜(대규모 사업 맞교환)이 강압적으로 이뤄졌으며 한중 민영화 이후 관련 설비 납품가격이 최고 2.7배 폭등했다는 문제가 최근 불거져 나오자 서둘러 그 배후세력에 대한 대응전략 수립에 나서는 한편 정치권의 동향 읽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안영근 한나라당 의원은 9월16일 산업자원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두산중공업이 3월 당진 화력발전소 5ㆍ6호기의 보일러와 터빈발전기를 1997년 태안 화력발전소가 동종 설비를 들여왔을 당시보다 최고 2.7배 비싼 가격에 수주했다”고 독점폐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최영천 두산중공업 상무는 “해당 설비는 97년 발전설비 시장에 첫 진출한 현대ㆍ삼성중공업이 원가보다 30, 40% 낮은 가격에 수주한데다 환율도 지금보다 40%이상 낮아 가격차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현대중공업 역시 해외 발전설비 입찰참여여부 허용문제를 놓고 빅딜의 ‘원죄’를 주장하며 두산에 포문을 겨누고 나섰다.

현대측은 “1999년 발전설비사업 빅딜은 당시 금융제재 등 정부의 강압에 의해 계약이 체결돼 자산과 사업을 박탈당했다”며 “특히 빅딜 계약조항이라는 명분으로 두산과 경쟁이 되지도 않는 해외사업 입찰 전에 참여 못하게 하는 것은 수출산업의 중요성을 망각한 독점폐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두산은 한중 인수후 3,000억원의 출자를 정부로부터 출자총액 규제에서 예외로 유일하게 인정 받아 또 한 번의 실익을 챙겼다. 또 재계 내부에선 5대그룹의 참여를 배제한 DJ정권 임기 중 공기업 헐값매각의 대표적 케이스로 한중 민영화를 꼽고 있어 논란의 파장은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이밖에도 재계에 따르면 호남기업을 대표하는 금호 그룹과 최근 센트럴시티를 인수한 애경 등 DJ의 ‘햇볕정책’에 음양으로 혜택(?)을 입은 일부 기업들의 정치권을 향한 물밑 구애(求愛)작업은 ‘대선전야’가 가까워 올수록 한층 빨라지고 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11/01 17:31


장학만 local@hk.co.kr